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영화를 보기 전까지 팀 버튼 감독이 만들면 무조건 볼 만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2010년작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보고 나서 그 믿음이 처음으로 흔들렸습니다. 비주얼은 압도적인데, 보고 나서 왜 이렇게 찜찜하지? 싶었던 영화입니다. 이 글은 그 찜찜함의 정체를 분석한 기록입니다.
비주얼 텔링: 팀 버튼이 만든 기형미의 세계
이 영화에서 가장 먼저 시선을 잡아채는 것은 미장센(mise-en-scène)입니다. 미장센이란 화면 안에 배치된 모든 시각적 요소, 즉 배우의 위치, 조명, 색채, 세트 디자인을 아우르는 영화 연출 개념입니다. 팀 버튼은 이 영화에서 미장센을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그 자체로 메시지가 되도록 설계했습니다.
헬레나 본햄 카터가 연기한 붉은 여왕의 비대하게 부풀린 머리, 조니 뎁의 창백하고 광기 어린 눈빛. 이것들은 단순한 분장이 아니라 캐릭터의 내면을 시각화한 결과물입니다. 붉은 여왕의 머리가 클수록 그녀의 권력욕이 크다는 것을, 모자 장수의 불안정한 눈빛은 그의 파편화된 정신 상태를 상징합니다. 제가 처음 이 장면들을 봤을 때는 솔직히 '이게 너무 과한 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는데, 분석해보니 의도된 과잉이었습니다.
색채 대비(color contrast) 역시 인상적입니다. 색채 대비란 화면 안에서 서로 다른 색을 의도적으로 충돌시켜 감정적 긴장감을 만드는 기법입니다. 언더랜드(Underland)의 뒤틀린 나무들과 흐릿한 하늘,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선명한 붉은 장미. 이 대비는 이 세계가 얼마나 병들었는지를 말로 설명하지 않고 보여줍니다. 대니 엘프먼이 작곡한 웅장하고 기괴한 음악까지 더해지면, 화면이 아니라 공간 전체로 관객을 끌어당기는 느낌이 납니다.
이 영화가 전 세계 박스오피스에서 약 10억 달러(한화 약 1조 3천억 원)를 벌어들였다는 사실은, 이 비주얼이 단순히 평론가들만 좋아하는 취향이 아니라 대중에게도 강하게 통했다는 증거입니다. (출처: Box Office Mojo)
서사 구조: 원작의 혼돈을 삼킨 할리우드 문법
그런데 여기서부터가 제가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는 비주얼로는 팀 버튼이지만, 서사(narrative)로는 철저히 할리우드 공식 영화입니다. 서사란 사건이 어떤 인과관계로 연결되어 이야기를 구성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루이스 캐럴의 원작 소설은 기승전결이 뚜렷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언어의 뒤집기, 논리의 붕괴, 아무 맥락 없이 튀어나오는 상황들이 원작의 핵심입니다. 원작이 주는 즐거움은 '이게 어떻게 해결될까'가 아니라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지'라는 당혹감 그 자체에 있습니다. 그런데 팀 버튼의 영화는 이 혼돈의 미학을 과감히 포기하고, 예언된 영웅이 괴수를 물리치고 세상을 구한다는 전형적인 영웅 서사(hero's journey)를 선택했습니다.
영웅 서사란 조지프 캠벨이 정립한 개념으로, 주인공이 일상에서 이탈해 시련을 겪고 귀환하는 보편적인 이야기 구조를 말합니다. 디즈니 영화의 상당수가 이 구조를 따릅니다. 이 틀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이 틀이 원작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근본적으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원작은 영웅이 없는 이야기이고, 해결이 없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지점에서 팀 버튼이 디즈니라는 자본의 논리에 일정 부분 타협했다고 봅니다. 전 세계 관객을 대상으로 한 대형 투자 영화가 원작의 혼돈을 그대로 구현하기는 상업적으로 매우 어려운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그 결과로 우리가 보게 된 것은, 기괴한 옷을 입었지만 내용은 익숙한 이야기입니다.
팀 버튼 스타일: 고딕 감성과 디즈니 자본의 충돌
팀 버튼 감독의 작품 세계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단어가 고딕 미학(Gothic aesthetics)입니다. 고딕 미학이란 어둠, 죽음, 기형, 소외라는 모티프를 아름다움의 언어로 표현하는 예술 양식을 말합니다. 팀 버튼은 '가위손', '비틀쥬스', '스위니 토드' 등을 통해 이 고딕 미학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발전시켜 온 감독입니다.
이 영화에서도 고딕 미학의 흔적은 분명히 보입니다. 썩어가는 성, 뒤틀린 나무, 이상하게 늘어진 신체 비율들. 그러나 동시에 이 영화는 전체관람가 등급을 받아야 하고, 디즈니라는 브랜드 이미지를 유지해야 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이 두 가지 요구 사이에서 팀 버튼은 어딘가 어정쩡한 위치에 서게 됩니다.
제가 보기에 이 영화의 가장 큰 문제는 과하면서도 동시에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비주얼은 어른도 놀랄 만큼 기괴하지만, 이야기는 아이에게 보여줘도 될 만큼 단순합니다. 참수 장면이나 신체 부위가 떨어지는 장면이 나오는데도 전체관람가로 분류된 것은 저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분장이 너무 과해서 오히려 현실감이 없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어린 아이들이 보기에는 분명히 자극적인 장면들입니다.
이 영화의 캐릭터들을 평가하자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 붉은 여왕(헬레나 본햄 카터): 시각적 임팩트는 가장 강하지만, 단순한 악역으로만 소비됩니다. 그녀가 왜 이렇게 됐는지에 대한 서사적 깊이가 부족합니다.
- 하얀 여왕(앤 해서웨이): '착한 사람'이라는 설정인데, 보다 보면 오히려 불편함이 생깁니다. 무력하고 무책임하게 보이는 행동들이 선함으로 포장되는 구조가 어색합니다.
- 모자 장수(조니 뎁): 팀 버튼의 페르소나답게 분장은 극단적이지만, 정작 이 캐릭터가 이야기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끝까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 앨리스(미아 와시코브스카): 오히려 이 중에서 가장 설득력 있는 캐릭터입니다. 주체적으로 결정하고, 현실로 돌아가 자신의 삶을 개척하는 모습은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앨리스가 남긴 것: 기억에 남는 메시지 하나
영화가 끝나고 제 머릿속에 남은 장면은 화려한 전투도, 붉은 여왕의 과장된 분장도 아니었습니다. 앨리스가 현실로 돌아와 수많은 사람 앞에서 당차게 포부를 밝히는 마지막 장면이었습니다. 이상한 나라에서 돌아온 앨리스는 더 이상 원치 않는 약혼에 끌려다니는 19살이 아닙니다. 아버지처럼 사업가의 길을 선택하고, 자신이 가고 싶은 방향으로 걸어갑니다.
이 장면이 인상 깊었던 이유는 판타지 모험의 결론이 '세상을 구했다'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찾았다'로 귀결되기 때문입니다. 이상한 나라에서의 경험이 결국 현실 세계의 앨리스를 바꿔놓는 구조. 이 부분만큼은 팀 버튼이 단순히 화려한 볼거리만 만든 것이 아니라는 걸 보여줍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 메시지 하나를 위해 1시간 45분을 감수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입니다. 팀 버튼 감독의 고딕 감성을 조금만 덜어냈더라면, 혹은 반대로 원작의 혼돈을 조금 더 충실히 살렸더라면, 이 영화는 지금보다 훨씬 강렬한 작품이 됐을 것입니다. 어중간한 타협이 결국 어중간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한국영화진흥위원회(KOFIC)의 자료에 따르면 이 영화는 국내에서도 상당한 흥행 성적을 거두었습니다.(출처: 한국영화진흥위원회)
결국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팀 버튼이라는 이름을 믿고 본 영화가 처음으로 저를 실망시킨 작품입니다. 비주얼에서는 그의 재능이 분명히 보이지만, 이야기에서는 그 재능이 절반쯤 묶인 느낌입니다. 팀 버튼 감독의 팬이라면 그 비주얼 하나만으로도 볼 이유는 충분합니다. 다만 이야기의 깊이까지 기대하신다면 기대치를 조금 낮추고 보시기를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