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헬드 카메라로 찍은 것 같은 흔들리는 화면, 이름도 나오지 않는 두 주인공, 86분짜리 짧은 러닝타임. 그런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저는 소파에서 한참 동안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존 카니 감독의 2007년작 아일랜드 영화 '원스(Once)'가 그랬습니다.
더블린 거리, 버스킹 한 장면이 모든 것을 바꿨다
혹시 아무도 봐주지 않는 거리에서 노래를 불러본 적 있으십니까? 저는 없습니다만, '원스'를 보고 나서 그 감각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게 된 것 같았습니다. 영화의 시작은 단순합니다. 아일랜드 더블린(Dublin)의 밤거리에서 한 남자가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낮에는 청소기를 고치고 밤에는 거리에서 버스킹(busking)을 합니다. 버스킹이란 거리에서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음악을 연주하며 공연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유럽에서는 아주 오래된 공연 문화이고, 더블린 그래프턴 스트리트는 특히 버스킹으로 유명한 거리입니다.
그날 밤도 지나치는 사람 하나 없이 텅 빈 거리였는데, 노래가 끝나자 박수 소리가 들립니다. 체코에서 건너와 잡지와 꽃을 팔며 생계를 이어가는 한 여자였습니다. 피아노를 좋아하지만 형편이 어려워 제대로 연주할 기회조차 없던 그녀가, 그 남자의 음악성을 단번에 알아본 것입니다. 제가 이 장면을 처음 봤을 때 살짝 의아했습니다. '이렇게 단순하게 만나도 되나?' 싶었거든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진짜 인연이란 게 원래 이렇게 우연하고 단순한 방식으로 찾아오는 것 아닐까요?
두 사람은 곧 여자가 자주 들르던 악기점을 함께 방문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즉흥적으로 함께 연주를 시작합니다. 남자가 기타를 치고, 여자가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고, 목소리가 어우러집니다. 이 장면에서 탄생하는 곡이 바로 'Falling Slowly'입니다. 이 곡은 제80회 아카데미 시상식(Academy Awards)에서 주제가상(Best Original Song)을 수상했습니다. 전체 제작비가 16만 달러에 불과했던 저예산 독립 영화의 곡이 세계 최고 권위의 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것입니다. 지금도 이 사실이 좀 믿기지 않을 정도입니다.
화려함 없이도 심금을 울리는 세 가지 이유
영화를 두 번, 세 번 다시 보면서 저는 계속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습니다. 도대체 이 영화의 어디에서 이 묵직한 감동이 나오는 걸까요? CGI도 없고, 유명 배우도 없고, 화려한 세트도 없습니다. 그 비결을 정리해보면 결국 세 가지로 압축됩니다.
- 핸드헬드(handheld) 카메라 촬영 기법의 활용입니다. 핸드헬드란 카메라를 삼각대 없이 손에 들고 촬영하는 방식으로, 화면이 약간씩 흔들리며 다큐멘터리 같은 생동감을 줍니다. 이 영화는 그 거친 질감 덕분에 오히려 두 인물의 감정이 가공 없이 날 것으로 전달됩니다.
- 사운드트랙(soundtrack)이 대사의 역할을 한다는 점입니다. 사운드트랙이란 영화에 삽입된 음악 전체를 가리키는 용어인데, '원스'에서는 인물이 차마 말로 꺼내지 못한 감정들이 고스란히 노래 가사로 흘러나옵니다. 그녀가 야간 버스 안에서 혼자 CD 플레이어로 음악을 들으며 중얼거리듯 부르는 'If You Want Me' 장면이 특히 그렇습니다. 저는 그 장면에서 눈물이 날 뻔했습니다.
- 미장센(mise-en-scène)의 힘입니다. 미장센이란 화면 안에 배치된 모든 시각적 요소, 즉 인물의 위치, 조명, 소품 등을 통해 의미를 전달하는 영화 언어를 말합니다. 영화 마지막에 그가 그녀의 집에 피아노를 선물로 남기고 떠나는 장면은 대사 한 마디 없이도 모든 것을 말해줍니다. 제 경험상 이런 미장센 하나가 어떤 긴 대사보다 훨씬 더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주인공 글렌 핸사드(Glen Hansard)는 전문 배우가 아닙니다. 아일랜드의 실제 뮤지션이고, 마르케타 잉글로바(Markéta Irglová) 역시 체코 출신 실제 음악가입니다. 두 사람이 스크린 안에서 보여주는 감정의 결이 유독 자연스러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전문 배우의 훈련된 연기가 아니라, 실제로 음악을 아는 사람들의 몸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니까요. 실제로 두 사람은 영화 개봉 이후 실제 연인이 되었고, 스웰 시즌(The Swell Season)이라는 그룹을 결성해 음반 활동과 세계 투어를 이어갔습니다. 한국에서도 내한 공연을 가졌습니다.
존 카니(John Carney) 감독에 대해서도 짚어두고 싶습니다. '원스' 이후 그는 '비긴 어게인(Begin Again, 2013)', '싱 스트리트(Sing Street, 2016)'를 연달아 발표하며 음악 영화의 1인자로 자리를 굳혔습니다. 세 작품 모두 음악이 상처 입은 사람들을 연결하고 치유한다는 주제를 공유합니다. 아일랜드 출신 감독이 이 주제를 이렇게 일관되게, 그리고 이렇게 담백하게 풀어낸다는 점이 저는 여전히 놀랍습니다. IMDb의 '원스' 페이지에서도 이 영화는 수만 명의 평점 참여자로부터 8점 이상의 높은 평가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원스'가 오늘의 우리에게 건네는 말
이 영화를 다시 보고 싶어지는 때가 언제인지 생각해보신 적 있습니까? 저는 유독 뭔가 지치고 공허해지는 날 밤에 이 영화를 꺼내게 됩니다. 지난 주말에도 거실 조명을 낮추고 혼자 다시 틀었습니다. 두 사람의 이름이 끝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번에는 다르게 읽혔습니다. 이름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그 남자가 저 자신처럼, 그 여자가 제 주변의 누군가처럼 느껴지는 것 아닐까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마르케타 잉글로바는 수상 소감을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무대 위에서 말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가, 사회자가 다시 불러준 덕분에 마이크 앞에 설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이 영화는 당신에게도 꿈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저예산 독립 영화의 무명 음악가가 세계 최대 영화제 무대에서 한 그 말이, 영화의 메시지와 정확히 겹쳤습니다. 그 장면이 저는 영화 본편만큼이나 감동적이었습니다. 관련 수상 내용과 배경은 아카데미 공식 홈페이지 제80회 시상식 페이지에서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내러티브(narrative), 즉 이야기 구조만 놓고 보면 '원스'는 특별할 것이 없습니다. 내러티브란 사건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연결되는 이야기 방식을 말하는데, 이 영화는 만남, 교감, 이별이라는 아주 단순한 3막 구조를 따릅니다. 그런데 그 단순함이 역설적으로 가장 보편적인 감정을 건드립니다. 해피엔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보고 나면 이상하게 위로가 됩니다. 두 사람이 서로의 삶에 아름다운 멜로디를 남기고 각자의 길을 걸어간다는 결말이, 사실 우리가 살면서 만나는 대부분의 소중한 인연과 닮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원스'는 화려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보고 나면 오래 마음에 남습니다. 아직 보지 않으셨다면 조용한 저녁 시간에 혼자, 혹은 소중한 사람과 함께 한번 틀어보시길 권합니다. 이 영화는 긴 설명보다 그냥 경험해보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보고 나서 'Falling Slowly'를 한 번만 더 찾아 들어보시면, 그날 밤은 꽤 괜찮은 밤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