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스승이란 과연 어떤 사람일까요. 격려하고 다독여주는 사람?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영화 <위플래쉬>를 보고 나서 그 질문이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다는 걸 알았습니다. 이 영화는 재즈 드러머 한 명의 성장기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당신은 무엇까지 잃을 수 있는가"를 묻는 영화입니다.
위대함의 대가 드럼을 위해 포기한 것들
뉴욕의 명문 셰이퍼 음악 대학에 입학한 19세의 재즈 드러머 앤드류 나이먼은 처음에는 그냥 열정 있는 청년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그가 단순한 꿈을 넘어 일종의 강박(obsession) 상태에 가까워진다는 걸 느끼게 됩니다. 강박이란 특정 목표나 생각이 일상의 모든 것을 잠식해가는 심리 상태를 말합니다. 앤드류에게 그건 드럼, 딱 하나였습니다.
그는 연인 니콜과 스스로 헤어집니다. 가족 모임에서도 겉돌고, 아버지와도 점점 멀어집니다. 밤새 드럼을 치다 손에서 피가 나는 장면은 저에게는 경탄보다 공포에 가까운 감정으로 다가왔습니다. 예술적 몰입이라기보다는 병적인 집착에 더 가깝다고 느꼈고, 솔직히 그 장면을 보면서 "이게 정말 아름다운 건가"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한 가족 모임 장면에서 앤드류가 내뱉는 대사가 있습니다. "30대에 술에 찌들어 죽더라도 이름을 남기고 싶다"는 말인데, 처음엔 젊은이의 허세처럼 들렸습니다. 그런데 영화 전체를 다 보고 나서 되새기면 그게 허세가 아니라 진심이었다는 게 더 소름 돋았습니다. 실제로 감독 데미언 셔젤은 인터뷰에서 "앤드류의 미래는 20대 후반쯤 약물중독으로 스스로 끝을 낼 것 같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 말이 영화의 결말에 얹히는 순간, 마지막 무대의 화려한 독주가 다르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영화는 앤드류의 선택을 비극으로만 규정하지 않습니다. 그가 스스로 고른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결정이 옳은지 그른지를 관객에게 떠넘기는 방식은, 보는 내내 꽤 불편했습니다. 아마 그 불편함이 이 영화의 의도인 것 같기도 했습니다.
채찍질 교육 플레쳐의 방식은 교육인가, 가스라이팅인가
플레쳐 교수(J.K. 시몬스)의 지도 방식을 처음 마주했을 때, 저는 이걸 교육학적으로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한참 고민했습니다. 의자를 던지고, 뺨을 때리고, 학생의 가정사를 다른 학생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들추는 행동. 앤드류의 어머니가 가족을 버리고 떠난 사실까지 폭로합니다. 이건 교육이 아니라 심리적 지배(psychological domination)에 가깝습니다. 심리적 지배란 상대방의 자존감과 판단력을 무너뜨려 통제권을 장악하는 행동 방식을 말합니다.
플레쳐는 이 방식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갖고 있습니다. "찰리 파커가 위대해진 건 조 존스가 던진 심벌즈에 맞았기 때문이다." 한계점(threshold)을 넘기는 압박만이 진짜 천재를 만든다는 주장입니다. 한계점이란 인간이 견딜 수 있는 스트레스나 압력의 경계선을 뜻합니다. 제가 보기에 이 논리는 반은 맞고 반은 위험합니다.
실제로 심리학 연구에서는 극도의 압박이 어떤 사람에게는 성장의 촉매가 되지만, 또 다른 사람에게는 트라우마(trauma), 즉 심리적 외상으로 남는다는 점이 반복적으로 확인되어 왔습니다. 영화 안에서도 플레쳐의 방식으로 무너진 학생이 명시적으로 등장합니다. 그러니 플레쳐의 논리를 전면 긍정하는 건 무리입니다. 관련하여 미국 심리학회(APA)의 회복탄력성 연구에서도 극단적 스트레스 환경이 오히려 장기적 수행 능력을 저하시킨다는 결과가 발표된 바 있습니다.
플레쳐가 절대 하지 않는 말이 있습니다. "잘했어." 그는 항상 더 요구합니다. 빠르냐 느리냐를 묻고, 기준 자체를 매번 흔들어 놓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방식은 동기부여가 아닙니다. 칭찬을 영원히 지연시키면서 학생을 심리적으로 불안정하게 만드는 건, 솔직히 말하면 가스라이팅(gaslighting)에 더 가깝습니다. 가스라이팅이란 상대방이 스스로의 판단을 믿지 못하도록 지속적으로 흔드는 심리적 조종 행위입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 부분이 가장 불편했고, 지금도 그 판단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플레쳐와 앤드류의 결정적 차이를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 앤드류의 완벽주의는 자기 자신을 향합니다. 그래서 고통스럽지만 성장이 만들어집니다.
- 플레쳐의 완벽주의는 타인을 향합니다. 그래서 그 에너지는 성장보다 파괴로 이어질 위험이 큽니다.
- 앤드류는 무너져도 다시 일어서는 동력이 내부에 있지만, 플레쳐의 방식은 그 동력 자체를 외부 의존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이 차이를 영화는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냥 두 사람을 나란히 놓고, 보는 사람이 스스로 느끼게 합니다. 그 방식이 꽤 영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지막 무대 그 독주는 반란이었을까, 완성이었을까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JVC 재즈 페스티벌 공연 장면입니다. 앤드류는 플레쳐에게 속아 한 번도 연습하지 않은 곡을 수백 명의 관객 앞에서 연주하게 됩니다. 플레쳐의 보복이었습니다. 앞서 앤드류의 진술로 해고된 것에 대한 복수. 첫 곡에서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한 앤드류는 무대 밖으로 빠져나갑니다.
그런데 그는 다시 걸어 들어옵니다. 플레쳐가 큐 사인을 주기도 전에 스스로 연주를 시작합니다. 단원들을 직접 지휘하며 독주로 공연 전체를 이끕니다. 저도 이 장면에서 처음에는 카타르시스(catharsis)를 느꼈습니다. 카타르시스란 억눌렸던 감정이 한 번에 폭발하듯 해소되는 심리적 정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잠시 후, 그 감정이 씁쓸하게 바뀌었습니다.
왜냐하면 생각해보면 그 독주는 플레쳐를 이긴 것이 아니라, 플레쳐가 만들어낸 앤드류가 완성된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앤드류가 플레쳐 없이도 홀로 설 수 있다는 선언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그를 이 경지까지 몰아붙인 건 플레쳐의 방식이었다는 사실이 지워지지 않습니다. 플레쳐도 그걸 알아보기에 지휘봉을 들고 앤드류를 따릅니다. 두 사람이 눈빛을 교환하고 미소 짓는 그 찰나, 지배와 피지배라는 구도는 무너지고 어떤 기묘한 상호인정의 형태가 됩니다.
그 장면이 아름답게 느껴지면서도 동시에 불편한 이유가 있습니다. 영화에 관한 다양한 분석들을 찾아보면, 로저 에버트 사이트의 리뷰에서도 마지막 장면을 "triumphal yet deeply unsettling(승리이면서 동시에 깊이 불안한)"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제가 느낀 감정과 정확히 일치했습니다. 아름다움과 불쾌함이 한 프레임 안에 공존하는 경험, 그것이 이 영화가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라고 생각합니다.
조명이 꺼지고 화면이 블랙아웃(black out)되는 그 순간, 저는 박수를 보내야 할지 애도해야 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 두 감정이 동시에 올라오는 것, 그게 이 영화가 단순한 성공 서사가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위플래쉬>는 보고 나서 뭔가 해소된 느낌보다 뭔가를 꾹 삼킨 느낌이 남는 영화입니다. 앤드류가 이룬 것은 분명하지만, 그가 잃어버린 것들도 화면 밖에서 계속 따라옵니다. 만약 이 영화를 아직 보지 않으셨다면, 음악 영화라는 기대를 내려놓고 보시길 권합니다. 그리고 만약 이미 보셨다면, 마지막 장면에서 본인이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한 번 다시 들여다보시길 바랍니다. 그 감정의 정체가 이 영화를 읽는 가장 정직한 방법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