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을 저질렀는데 오히려 스타가 된다면,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롭 마샬 감독의 2002년작 <시카고>(Chicago)를 처음 봤을 때 저도 그 황당함에 잠시 멈췄습니다. 그런데 113분이 끝나고 나서는 오히려 "이게 진짜 세상이 작동하는 방식 아닌가?"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오스카 작품상을 포함해 6개 부문을 수상한 이 작품은, 단순한 뮤지컬 영화가 아니라 언론과 대중 심리를 해부하는 블랙 코미디입니다.
교차편집: 현실과 무대가 충돌하는 방식
이 영화가 다른 뮤지컬 영화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이유는 교차편집(Cross-cutting) 기법에 있습니다. 교차편집이란 두 개 이상의 공간이나 시간대를 번갈아 보여주며 의미를 충돌시키는 편집 방식입니다. 롭 마샬은 이 기법을 단순한 시각적 장치가 아니라 서사의 뼈대로 삼았습니다.
록시 하트(르네 젤위거 분)가 남편에게 심문을 받는 장면이 동시에 화려한 보드빌 무대로 전환될 때, 저는 처음에 편집이 좀 갑작스럽다고 느꼈습니다. 그런데 두세 번 반복되는 이 패턴을 따라가다 보면, 오히려 그 갑작스러움 자체가 인물의 내면을 드러내는 장치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현실은 초라하고 법정은 냉정하지만, 인물의 욕망 속에서는 모든 것이 쇼가 됩니다.
뮤지컬 영화의 고질적인 약점은 갑자기 노래가 시작될 때 발생하는 서사적 단절감입니다. 이 단절감은 관객을 현실에서 끌어내어 몰입을 방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롭 마샬은 처음부터 현실과 무대를 구분된 공간으로 선언해버림으로써 이 문제를 정면 돌파했습니다. 그 덕분에 <시카고>는 뮤지컬 영화가 가진 어색함의 문제를 장르 역사상 가장 영리하게 해결한 사례로 남아 있습니다.
실제로 <시카고>는 2003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편집상을 수상했는데, 뮤지컬 영화가 편집상을 받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입니다. 그 수상 자체가 이 교차편집이 단순한 기교가 아닌 핵심 예술적 성취였음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출처: Academy of Motion Picture Arts and Sciences).
밥 포시 스타일: 손끝 하나도 허투루 쓰지 않는다
이 영화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밥 포시(Bob Fosse)를 알아야 합니다. 밥 포시는 20세기 브로드웨이를 대표하는 안무가이자 연출가로, 재즈 댄스에 관능성과 풍자를 결합한 독보적인 무대 문법을 만들어낸 인물입니다. <시카고>는 원래 1975년 밥 포시가 브로드웨이 무대에 올린 작품입니다.
밥 포시 스타일의 핵심은 미니멀리즘(Minimalism)에 있습니다. 미니멀리즘이란 최소한의 요소만 남기고 군더더기를 제거해 본질을 극대화하는 미학적 접근법입니다. 화려한 세트 대신 검은 의상, 조명, 그리고 몸의 움직임만으로 무대를 가득 채우는 방식이죠. 캐서린 제타 존스가 선보이는 벨마 켈리의 안무를 보면, 손목의 꺾임 각도와 어깨의 미세한 떨림까지 모든 동작에 의도가 담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Cell Block Tango' 시퀀스는 이 스타일의 정점입니다. 여섯 명의 여죄수가 각자의 살인 사연을 노래하는 이 장면에서, 빨간 스카프와 의자만으로 폭력과 욕망을 동시에 표현해냅니다. 제가 이 장면을 처음 봤을 때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뮤지컬 영화에서 이 정도의 밀도를 기대하지 않았거든요. 안무 하나가 대사 열 줄보다 많은 것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르네 젤위거의 경우는 더 인상적입니다. 원래 로맨틱 코미디 이미지가 강했던 배우가, 이 영화를 위해 수개월간 재즈 댄스와 탭 댄스를 훈련했습니다. 엔딩에서 캐서린 제타 존스와 함께 펼치는 듀엣 무대를 보면, 그 훈련이 얼마나 혹독했을지 짐작이 됩니다. 이 작품으로 그녀는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고, 캐서린 제타 존스는 여우조연상을 가져갔습니다.
풍자: 언론과 법정을 동시에 해부하다
이 영화가 단순한 오락물이 아닌 이유는 황색 저널리즘(Yellow Journalism)을 정면으로 겨냥하기 때문입니다. 황색 저널리즘이란 사실의 정확성보다 자극적인 내용으로 독자의 감정을 자극해 판매 부수를 늘리려는 선정적 언론 행태를 뜻합니다. <시카고>는 이것을 1920년대 시카고라는 배경 위에서 재즈 넘버로 풀어냅니다.
변호사 빌리 플린(리차드 기어 분)이 록시를 무릎에 앉히고 기자회견을 조종하는 'We Both Reached for the Gun' 장면은, 미디어가 진실이 아닌 서사를 소비한다는 것을 이렇게 위트 있게 보여준 장면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기자들은 빌리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받아 적기 바쁘고, 록시는 그저 복화술 인형처럼 입을 움직입니다. 저는 이 장면을 볼 때마다 컴퓨터 교실에서 학생들에게 정보 리터러시를 가르치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뉴스를 왜 비판적으로 읽어야 하는가"를 설명할 때 이 장면 하나면 충분하겠다 싶었거든요.
리차드 기어의 변신도 이 맥락에서 읽어야 합니다. 늘 무게 잡는 이미지였던 그가 탭 댄스를 추고 복화술을 하는 모습은 단순한 이미지 전환이 아닙니다. 빌리 플린이라는 캐릭터 자체가 진지함을 연기하는 사기꾼이기 때문에, 리차드 기어가 과거에 쌓아온 중후한 이미지가 오히려 이 역할의 아이러니를 배가시킵니다.
이 영화가 시대를 초월해 유효한 이유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언론이 진실보다 자극적인 서사를 선호하는 구조는 1920년대나 지금이나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 법정이 때로는 진실을 규명하는 공간이 아니라 설득력 있는 쇼를 펼치는 무대가 된다는 비판은, 미국 법정 드라마의 역사를 통틀어도 이만큼 압축적으로 표현된 작품을 찾기 어렵습니다.
- 평범한 사람이 미디어에 의해 스타로 만들어지고, 다시 잊혀지는 메커니즘은 소셜 미디어 시대인 지금 더욱 직접적으로 체감됩니다.
이 세 가지 주제가 하나의 뮤지컬 넘버 안에 동시에 녹아드는 방식이, <시카고>가 단순한 장르 영화를 넘어서는 지점입니다. 뮤지컬 영화의 오락성과 사회적 풍자가 이렇게 완벽하게 결합된 사례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좀처럼 보기 어렵습니다(출처: American Film Institute).
전망: 뮤지컬 영화의 황금기를 열었지만, 후계자는 없다
<시카고> 이후 뮤지컬 영화의 흐름을 돌아보면 흥미로운 패턴이 보입니다. 이 작품이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2003년 이후, <라라랜드>(2016), <위대한 쇼맨>(2017), <캣츠>(2019) 등 굵직한 뮤지컬 영화들이 잇따라 제작되었습니다. 그 전까지 아카데미에서 오랫동안 홀대받았던 뮤지컬 장르가 주류로 복귀하는 데 <시카고>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제가 그 작품들을 하나씩 보면서 느낀 것은, 롭 마샬이 <시카고>에서 완성한 교차편집과 블랙 코미디의 조합을 그대로 계승한 작품이 단 하나도 없다는 점입니다. <라라랜드>는 감성적 드라마로 방향을 틀었고, <위대한 쇼맨>은 스펙터클에 집중했습니다. 각각 훌륭한 작품들이지만, <시카고>처럼 오락과 풍자를 50대 50의 비율로 팽팽하게 유지한 작품은 아직 나오지 않은 것 같습니다.
뮤지컬 영화 장르에서 딕시 치익스 원칙(Diegetic Music)과 비딕시 원칙(Non-diegetic Music)의 경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도 이 장르의 핵심 과제입니다. 딕시 음악(Diegetic Music)이란 영화 속 인물들도 들을 수 있는 음악, 즉 서사 공간 안에 존재하는 음악을 말합니다. 반면 비딕시 음악(Non-diegetic Music)은 관객만 듣는 배경음악입니다. <시카고>는 이 두 층위를 의도적으로 혼재시켜 인물의 내면과 현실 사이의 경계를 흐리는 방식을 택했고, 이것이 독보적인 몰입감의 근거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