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기 싫은 영화가 있습니다. 무겁다는 걸 알면서도 억지로 재생 버튼을 누르게 되는 영화 말입니다. 저한테 <대니쉬 걸>이 딱 그랬습니다. 트랜스젠더를 다룬 실화라는 말에 괜히 마음의 준비를 했는데, 막상 영화가 끝나고 나서는 한참 동안 화면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1920년대 덴마크를 배경으로 세계 최초로 성전환 수술을 받은 화가 릴리 엘베의 실화를 다룬 이 영화, 생각보다 훨씬 조용하게, 그리고 훨씬 깊게 파고드는 작품이었습니다.
억지로 틀었다가 눈을 못 뗀 영화
솔직히 말하면 저는 이 영화를 볼 마음이 없었습니다. 트랜스젠더라는 소재 자체를 나쁘게 본 건 아니었지만, 무거운 영화는 왠지 에너지를 잔뜩 소모할 것 같아서 늘 뒤로 미뤄두는 편이었거든요. 결국 옆에서 강력하게 권하는 사람 덕분에 억지로 재생했습니다. 그런데 영화가 시작되고 20분쯤 지났을 때, 저는 이미 자세를 고쳐 앉아 있었습니다.
영화의 배경은 1926년 덴마크 코펜하겐입니다. 주인공 에이나르 베게너는 잘나가는 풍경화가이고, 아내 게르다 역시 화가입니다. 이 부부의 일상은 게르다의 작은 장난 하나로 뒤흔들립니다. 여성 모델이 오지 못하자 게르다가 남편에게 여장을 부탁하고, 에이나르는 실크 스타킹과 드레스를 걸치는 순간 어딘가 모르게 편안함을 느낍니다. 제가 직접 겪어보니 이런 '우연한 계기'가 사실 모든 변화의 출발점이 된다는 걸 압니다.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면 자신도 몰랐던 재능이나 성향이 작은 계기 하나로 표면 위로 올라오는 경우를 숱하게 봐왔거든요.
파티에서 에이나르는 '릴리'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한 남성에게 키스를 받습니다. 이 장면에서 영화는 아무 설명도 하지 않습니다. 그냥 에이나르의 표정을 가만히 비출 뿐입니다. 그 침묵이 오히려 더 많은 걸 말해주었습니다.
성 정체성, 그리고 1920년대 의학의 민낯
성 정체성(Gender Identity)이란 자신이 어떤 성별에 속한다고 내면적으로 느끼는 감각을 뜻합니다. 오늘날에는 이를 개인의 고유한 특성으로 이해하는 사회적 인식이 점차 자리 잡고 있지만, 영화 속 1920년대 유럽에서 이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에이나르가 찾아간 전문의들은 그를 동성애자로 분류하거나, 정신질환자로 단정하고 강제로 격리하려 했습니다.
트랜스젠더(Transgender)란 생물학적 성별과 자신이 내면적으로 느끼는 성별 정체성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을 일컫습니다. 현재는 세계보건기구(WHO)가 트랜스젠더 관련 상태를 정신질환 목록에서 공식 삭제했습니다만(출처: WHO ICD-11 발표), 릴리 엘베가 살았던 시대에는 전혀 달랐습니다. 방사선 치료를 강요받거나 정신병원에 끌려가는 게 당연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때 느낀 건, 이 장면들이 단순한 역사적 배경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비슷한 벽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 한구석을 짓눌렀습니다. 릴리는 결국 독일 드레스덴의 마그누스 히르슈펠트 연구소를 찾아가 성전환수술(Sex Reassignment Surgery)을 받게 됩니다. 성전환수술이란 당사자의 신체를 내면의 성 정체성에 맞게 의학적으로 전환하는 수술 과정을 말합니다. 당시로서는 전례가 없는, 그야말로 목숨을 건 선택이었습니다.
릴리 엘베가 역사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는지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1882년 덴마크에서 에이나르 베게너로 출생, 풍경화가로 활동.
- 1930년 독일에서 세계 최초로 성전환수술을 시작, 총 4차례 수술 진행.
- 1931년 네 번째 수술 후 합병증으로 사망, 향년 48세.
- 사망 이후 아내 게르다가 그녀의 삶을 소설로 기록, 이 소설이 영화의 원작이 됨.
에디 레드메인, 그리고 게르다의 무게
에디 레드메인은 제가 <레미제라블>에서 처음 보고 나서부터 눈여겨봐온 배우입니다. 그때도 눈빛 하나로 감정을 전달하는 능력에 놀랐는데, <대니쉬 걸>에서는 그 수준이 또 달랐습니다. 에이나르가 처음으로 실크 드레스의 감촉을 느끼는 장면, 그 짧은 순간에 그의 얼굴을 스쳐 지나가는 감정의 레이어가 적어도 서너 가지는 되어 보였습니다. 황홀함, 두려움, 낯선 안도감. 대사 한 마디 없이 그걸 다 보여줬습니다.
미장센(Mise-en-scène)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화면 안에 담기는 모든 시각적 요소, 즉 조명, 색감, 배우의 위치, 소품까지를 연출자가 의도적으로 배치하는 것을 말합니다. 톰 후퍼 감독은 이 영화에서 미장센을 극도로 정교하게 활용했습니다. 초반 코펜하겐의 차갑고 회청색 빛깔에서, 릴리가 파리로 향하면서 점차 따뜻한 황금빛으로 색감이 바뀌는 흐름이 그 예입니다. 두 화가를 주인공으로 삼은 만큼 모든 장면이 한 편의 정물화처럼 구성되어 있어서, 저는 중간중간 "이 화면을 캡처해두고 싶다"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습니다.
그러나 제 경험상 이 영화에서 진짜 심장을 때리는 건 에디 레드메인이 아니라 게르다 역의 알리시아 비칸데르였습니다. 남편이 사라져가는 걸 눈앞에서 보면서도 끝까지 그의 손을 잡아주는 게르다. 감정을 터뜨리지 않고 꾹꾹 눌러 담다가 어느 순간 무너지는 그 연기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사람의 내면이 실제로 어떤 상태인지를 너무 정확하게 담아냈습니다. 비칸데르가 그해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건 전혀 놀랍지 않았습니다.
이 영화가 불편하지 않은 이유
트랜스젠더를 소재로 한 영화라고 하면 자극적이거나 선정적인 연출을 먼저 떠올리는 분들도 있습니다. 저도 솔직히 그런 선입견이 없었다면 거짓말입니다. 그런데 <대니쉬 걸>은 그런 방향과는 완전히 반대입니다. 이 영화는 내내 조용합니다. 자극을 주는 대신 관객이 스스로 생각하게 만드는 공간을 만들어둡니다.
성별 위화감(Gender Dysphoria)이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자신의 신체적 성별과 내면의 성 정체성 사이의 불일치에서 오는 심리적 고통을 말합니다. 미국심리학회(APA)에 따르면 이 상태는 단순한 혼란이나 변덕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강렬한 내면의 경험입니다(출처: 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 영화는 이 개념을 대사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대신 에이나르가 자신의 몸을 바라보는 방식, 여성 모델의 자세를 조심스럽게 따라 해보는 장면 같은 것들로 그것을 보여줍니다.
영화가 끝난 뒤 한동안 저는 학교에서 만났던 아이들의 얼굴을 떠올렸습니다. 남들보다 조금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하다가 주변의 시선에 움츠러드는 아이들. 그때 제가 충분히 그 아이 곁에 있어줬는지가 문득 마음에 걸렸습니다. 이 영화가 불편하지 않은 이유는 그것이 누군가를 설득하려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냥 한 사람의 이야기를 보여줄 뿐인데, 보고 나면 자연스럽게 한 번쯤 생각해보게 됩니다. 온전한 자신으로 숨 쉬기 위해 그 사람은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했을까, 하고요.
억지로 틀었다가 끝까지 눈을 못 뗀 영화, 그게 <대니쉬 걸>이었습니다. 무거운 주제가 부담스럽다면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합니다. 저도 그랬으니까요. 그래도 한 가지만 말씀드리자면, 이 영화는 생각보다 훨씬 조용하고, 생각보다 훨씬 오래 남습니다. 트랜스젠더에 관심이 없어도, 그냥 오래 기억에 남는 영화 한 편이 보고 싶으시다면 충분히 권해드릴 수 있는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