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물간 배우가 연극 무대에서 진짜 총으로 자신을 쏜다면, 그게 비극일까요 아니면 그의 인생 최고의 연기일까요. 2014년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알레한드로 G. 이냐리투 감독의 <버드맨>을 처음 봤을 때, 저는 그 질문 앞에서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컴퓨터 교실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제가, 왜 이 영화 앞에서 이렇게 얼어붙어 버렸을까요.
롱테이크가 만들어낸 숨막히는 현실감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저는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습니다. 화면이 끊기지 않는 겁니다. 장면이 바뀌어야 할 것 같은 순간에도 카메라는 계속 따라옵니다. 좁은 복도를 지나고, 분장실을 통과하고, 무대 뒤편의 혼돈 속으로 쉬지 않고 밀고 들어옵니다. 처음에는 "이거 편집 실수인가?" 싶을 정도였으니까요.
이 기법이 바로 원 컨티뉴어스 숏(One Continuous Shot)입니다. 영화 전체가 단 한 번의 끊김 없이 찍힌 것처럼 보이도록 편집점을 교묘하게 숨긴 촬영 방식을 뜻합니다. 촬영감독 엠마누엘 루베즈키가 이냐리투 감독과 함께 설계한 이 기법 덕분에, 관객은 브로드웨이 극장 뒤편에 실제로 서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집니다. 마치 주인공 리건 톰슨의 머릿속에 갇혀버린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요.
여기에 안토니오 산체스의 재즈 드럼 사운드트랙이 더해집니다. 이 드럼 비트는 단순한 배경 음악이 아닙니다. 다이에제시스(Diegesis)란 영화에서 극 중 인물이 실제로 듣거나 경험하는 소리를 가리키는 용어인데, 이 영화의 드럼은 그 경계를 의도적으로 허뭅니다. 인물들이 드럼 소리의 존재를 인식하는 듯 행동하면서도, 어느 순간엔 리건의 불안한 심리를 대변하는 순수한 감정음악으로 기능합니다. 처음 그 드럼 소리를 들었을 때, 저는 심장이 따라 두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긴장감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한 번도 풀리지 않았습니다.
직접 겪어보니, 이 두 가지 장치가 합쳐졌을 때의 효과는 단순히 "영상미가 좋다"는 수준을 훨씬 넘어섭니다. 관객을 리건의 감정 상태 안으로 물리적으로 끌어당기는 느낌입니다. 평단이 이 작품을 그토록 높이 평가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메타픽션이 파고든 마이클 키튼의 민낯
영화를 보면서 저는 한 가지 불편한 생각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이거 마이클 키튼 본인 이야기 아닌가?"
리건 톰슨은 과거 '버드맨'이라는 슈퍼히어로 시리즈로 전 세계적인 인기를 누렸지만, 지금은 브로드웨이에서 연극으로 재기를 노리는 배우입니다. 마이클 키튼은 실제로 팀 버튼 감독의 <배트맨>(1989)과 <배트맨 리턴즈>(1992)로 최고의 전성기를 보냈지만, 이후 스크린에서 서서히 잊혀진 배우입니다. 그리고 버드맨은 실제 DC 코믹스의 캐릭터로, 배트맨보다 앞서 등장한 히어로입니다. 배트맨의 탄생 자체가 버드맨의 영향을 받은 만큼, 마이클 키튼이 버드맨을 연기한다는 설정은 단순한 우연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메타픽션(Meta-fiction)입니다. 허구의 이야기 안에 현실의 맥락을 의도적으로 삽입해 독자 혹은 관객이 허구와 현실의 경계를 의식하게 만드는 서사 기법을 뜻합니다. 이냐리투 감독은 이 장치를 통해 한 가지 날카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대중문화는 배우 개인을 캐릭터로 소비하고, 그 캐릭터가 소멸하면 배우도 함께 지워버리는 게 아닌가 하고요.
그래서 저는 영화 속 또 다른 인물 마이크에 주목했습니다. 티켓 판매를 책임지는 흥행 보증 배우지만, 인성은 막무가내입니다. 공연 중에 진짜 술을 마시고, 자기 멋대로 연기하면서도 관객의 박수를 받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아내의 등장 이후 리건의 과거를 돌이켜보면 그도 한때는 마이크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물 간 리건이 마이크를 보며 분노하는 장면은, 자기 자신의 젊은 시절을 바라보며 불편함을 느끼는 것처럼 읽혔거든요. 제 경험상 이런 이중적인 감정은 현실에서도 꽤 자주 마주치게 됩니다.
참고로 아카데미상 공식 자료에 따르면 <버드맨>은 제87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촬영상을 포함해 총 4개 부문을 수상했습니다.(출처: The Academy of Motion Picture Arts and Sciences)
버드맨이라는 환상, 그리고 리건의 갈등 구조
영화 초반에는 리건이 공중부양을 하거나 염력으로 물건을 날리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처음에 저는 이 영화가 실제 슈퍼히어로물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후반부에 이르러서야 그것이 전부 리건의 상상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이 구조를 영화 이론에서는 비신뢰할 수 있는 서술자(Unreliable Narrator) 기법이라고 부릅니다. 이야기를 이끄는 시점 인물의 인식 자체가 왜곡되어 있어, 관객이 그 시각을 무비판적으로 따라가다가 결정적 순간에 충격을 받게 되는 장치를 뜻합니다. 초반 리건의 초능력 장면들은 그의 과대망상적 자아, 즉 '버드맨'이라는 환영이 얼마나 그를 지배하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 영화에서 리건을 둘러싼 인물들을 정리해보면 각각이 그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 역할을 합니다.
- 마이크: 과거 전성기 시절 리건의 모습을 반영하는 인물. 재능과 오만함이 공존합니다.
- 전처 실비아: 리건의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매개체. 그녀를 대하는 리건의 태도 변화가 곧 그의 몰락을 보여줍니다.
- 딸 샘: 리건이 놓친 일상의 시간을 상징합니다. 기특하다고 칭찬하려다 오히려 상처를 주는 장면에서, 리건의 단절감이 집약됩니다.
- 평론가 타비사: 예술 권력의 화신. 리건의 연극을 보기도 전에 혹평을 예고하는 그녀는, 예술가의 생사여탈을 쥔 비평 권력의 폭력성을 상징합니다.
그때 느낀 건, 이 네 명의 인물 모두가 결국 리건 자신의 분열된 자아를 구성하는 조각들처럼 보인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냐리투 감독은 단순히 드라마적 갈등을 만들기 위해 이 인물들을 배치한 게 아니라, 리건의 내면 지형도를 입체적으로 그리기 위해 활용한 것 같았습니다.
버드맨 결말 해석, 저는 이렇게 읽었습니다
영화의 결말은 두 갈래로 해석됩니다. 리건은 드디어 열린 첫 공연 무대에서 실제 권총으로 자신을 쏩니다. 총알은 코를 스쳐 목숨은 건지고, 이 사건이 오히려 화제가 되어 대중의 관심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병원 창문으로 뛰어내리며 영화는 끝납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딸 샘이 창밖을 올려다보며 경이로운 표정을 짓는 것으로 화면이 닫힙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그래서 살았어, 죽었어?" 하고 혼자 꽤 오래 생각했습니다. 한 해석은 리건이 버드맨이라는 환상에서 마침내 벗어나, 날아오르는 새를 보고 진짜로 뛰어내려 죽었지만 딸의 눈에는 아버지가 하늘을 나는 것으로 보였다는 읽기입니다. 또 다른 해석은 공연 도중 총을 쐈을 때 이미 사망했고, 이후 장면들은 모두 그의 마지막 환상이었다는 것입니다. 대중에게 갑자기 인기를 얻는 아이러니한 결말이, 현실보다는 리건이 원했던 바람에 가깝다는 점에서 이 두 번째 독해가 더 설득력 있다고 저는 느꼈습니다.
카타르시스(Catharsis)란 비극을 통해 관객이 감정적 정화와 해방을 경험하는 현상을 가리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입니다. 리건의 결말이 죽음이든 환상이든, 그 장면에서 제가 느낀 감정은 분명히 그 카타르시스와 맞닿아 있었습니다. 인정받고 싶어 했던 한 사람의 처절함이, 어느 순간 아름다움으로 바뀌는 그 순간 말이죠.
평론가들이 이 영화에 열광한 반면, 일부 관객들이 지루하다고 느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충분히 볼만한 가치가 있는 영화도 영화를 보고나서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추천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