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8개 부문 후보에 오른 영화가 있습니다. 제74회 시상식에서 미술상과 의상상을 가져간 바즈 루어만 감독의 <물랑루즈>입니다. 처음 이 영화를 틀었을 때 저는 솔직히 당황했습니다. 이게 영화인지 뮤직비디오인지 구분이 안 될 만큼, 첫 10분이 그냥 시각적 폭격이었거든요.
뮤지컬 영화가 지루하다고 느끼는 분들께
뮤지컬 영화를 멀리하는 분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노래가 갑자기 나와서 몰입이 깨진다"는 게 가장 흔한 이유죠. 저도 그랬습니다. 평소 컴퓨터 교실에서 논리적인 코딩을 가르치는 일을 하다 보니, 오히려 감성적인 장르에는 쉽게 문을 열지 못하는 편이었습니다. 그런데 <물랑루즈>는 그 문을 그냥 부숴버렸습니다.
이 영화가 다른 뮤지컬 영화들과 결정적으로 다른 지점은, 노래가 서사를 끊지 않는다는 겁니다. 오히려 감정이 말로는 모자랄 때 음악이 터져나오는 구조여서, 비틀즈나 엘튼 존의 곡이 흘러나와도 19세기 파리의 이야기에서 이탈하는 느낌이 없습니다. 바즈 루어만 감독이 이 작품으로 완성한 이른바 '붉은 커튼 3부작'의 정점답게,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인위적인 무대 위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관객에게 숨기지 않습니다. 그 솔직함이 오히려 몰입을 만들어냅니다.
미장센(mise-en-scène)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미장센이란 화면 안에 배치되는 모든 시각적 요소, 즉 조명, 색채, 배우의 위치, 무대 장치 등을 종합적으로 설계하는 연출 방식을 뜻합니다. <물랑루즈>의 미장센은 19세기 몽마르트르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원색의 네온, 과장된 무대 조명, 실제보다 크게 만든 세트를 의도적으로 뒤섞어 '현실 같은 비현실'을 만들어냅니다. 처음엔 과하다고 느꼈는데, 두 번 보고 나서야 그게 전략이었다는 걸 알았습니다.
주크박스 뮤지컬이 왜 이 영화에서 통했나
주크박스 뮤지컬(Jukebox Musical)이란 기존에 발표된 대중음악들을 극의 서사에 맞게 재배열하여 사용하는 뮤지컬 형식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 새 곡을 만드는 대신, 이미 사람들이 알고 있는 명곡들을 이야기 속에 집어넣는 방식입니다. <물랑루즈>는 이 형식을 대중에게 본격적으로 알린 선구적 작품으로 평가받습니다.
그런데 이 방식이 늘 성공하는 건 아닙니다. 익숙한 노래가 나오는 순간 관객이 '아, 저 노래'에 집중하게 되면서 이야기 흐름이 끊기는 경우가 많거든요. 제 경험상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음악이 감정의 '도구'가 아니라 감정 그 자체가 되어야 합니다. <물랑루즈>는 거기서 성공했습니다.
대표적인 장면이 'El Tango de Roxanne'입니다. 폴리스(The Police)의 록 발라드 'Roxanne'을 아르헨티나 탱고 리듬으로 완전히 재해석한 이 시퀀스는, 질투와 광기가 육체적 언어로 폭발하는 장면과 맞물리면서 단순한 삽입곡이 아닌 서사 그 자체가 됩니다. 저는 이 장면을 처음 봤을 때 숨을 참고 있었다는 걸 나중에야 알아차렸습니다.
니콜 키드먼과 이완 맥그리거가 각자 직접 소화한 보컬도 이 영화의 설득력을 높이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전문 뮤지컬 배우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특히 키드먼은 이 작품으로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습니다. 기교보다 인물의 진심이 먼저 들리는 가창이었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Come What May'를 들으면서 눈물이 고인 건 솔직히 예상 밖이었습니다.
<물랑루즈>가 뮤지컬 영화사에 남긴 의미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주크박스 뮤지컬 형식을 영화 장르로 본격 대중화한 첫 사례로 꼽힙니다.
- MTV식 빠른 교차편집(cross-cutting)을 극영화에 도입해 뮤지컬 특유의 '정박된 카메라'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 비틀즈, 마돈나, 데이비드 보위, 퀸 등 세기를 대표하는 팝 아티스트들의 곡을 단일 서사 안에 응집시켜 세대 간 감정 공유를 만들어냈습니다.
- 2002년 이후 주크박스 뮤지컬 영화 붐(<맘마미아!> 등)의 직접적인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뮤지컬 영화의 역사적 흐름에 대해 더 깊이 살펴보고 싶다면 영국 영화 협회(BFI)의 뮤지컬 영화 목록을 참고하시면 도움이 됩니다. BFI는 20세기 초반부터 현재까지 뮤지컬 장르의 흐름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두고 있습니다.
이 영화, 어떻게 보면 더 잘 보이나
보헤미아니즘(Bohemianism)이라는 개념이 이 영화 전체의 정신적 토대입니다. 보헤미아니즘이란 기존의 사회 관습이나 물질적 가치를 거부하고 예술, 자유, 낭만을 삶의 중심에 두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영화 속 크리스티앙을 비롯한 몽마르트르의 예술가들이 공유하는 네 가지 가치, 즉 진실(Truth), 아름다움(Beauty), 자유(Freedom), 사랑(Love)이 바로 이 정신을 요약한 것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처음에 낮에 봤다가 별로라고 느낀 적이 있습니다. 두 번째엔 거실 조명을 낮추고 헤드폰을 끼고 다시 봤는데, 완전히 다른 영화처럼 느껴졌습니다. 시각과 청각을 동시에 압도하도록 설계된 작품이기 때문에, 보는 환경이 감상의 질을 직접적으로 결정합니다.
내러티브 구조(Narrative Structure) 측면에서도 이 영화는 흥미롭습니다. 내러티브 구조란 이야기가 관객에게 전달되는 방식과 순서를 의미하는데, <물랑루즈>는 결말을 첫 장면에서 이미 보여주고 시작합니다. 크리스티앙이 슬픔에 잠겨 타자기를 두드리는 장면으로 영화가 열리기 때문에, 관객은 처음부터 이 사랑이 비극으로 끝난다는 걸 압니다. 그런데도 그 과정이 아프고 아름답습니다. 결말을 알면서도 감정이 무뎌지지 않는 영화는 생각보다 드뭅니다.
처음 보는 분이라면 자막 없이 화면만 먼저 15분 정도 흘려보는 것도 추천합니다. 대사보다 시각 언어가 먼저인 영화이기 때문에, 미술과 색채가 어떻게 감정을 이끌어가는지를 먼저 느끼고 나면 이후 서사가 훨씬 깊이 들어옵니다. 영화를 어떻게 읽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분들께, 이 방법이 저에게는 꽤 유효했습니다. 아카데미 미술상과 의상상이 괜히 나온 게 아니라는 걸 이 방식으로 보면 바로 알 수 있습니다.
<물랑루즈>의 의상과 세트 디자인에 대한 시각적 분석이 궁금하신 분은 미국 아카데미 공식 사이트의 제74회 시상식 기록에서 수상 부문 전체 목록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이 영화가 오래 살아남는 이유는 스펙터클 때문만이 아닙니다.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누군가를 사랑하고, 또 사랑받는 것이다"라는 대사는 단순하지만, 비극이 절정에 달한 순간에 들으면 가슴 깊이 박힙니다. 제 곁의 가족들 손을 한 번 더 다정하게 쥐어보게 만든 영화 중 하나입니다. 뮤지컬이 낯선 분, 혹은 오래전에 봤지만 기억이 흐릿한 분이라면 조명을 낮추고 다시 한 번 꺼내보시길 권합니다. 생각보다 훨씬 다른 영화를 만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