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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긴 어게인 (미장센, 사운드트랙, 음악치유)


음악 관련 서사를 다룬다는 것 정도만 알고 틀었는데, 104분이 끝나고 나서 한동안 자리를 못 일어났습니다. 존 카니 감독의 2013년작 비긴 어게인은 상처받은 두 사람이 뉴욕이라는 도시를 무대 삼아 음악으로 다시 일어서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이 영화를 처음 본 건 꽤 지쳐 있던 어느 주말 저녁이었는데, 그게 이 영화와 제 관계의 시작이었습니다.

미장센이 만들어낸 뉴욕 전체의 녹음실

영화를 분석하면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개념이 미장센(mise-en-scène)이었습니다. 미장센이란 화면 안에 배치된 모든 시각적 요소, 즉 배우의 위치, 조명, 배경, 소품 등을 통해 감독이 의도한 분위기와 의미를 만들어내는 연출 방식을 뜻합니다. 일반적인 음악 영화라면 조명이 완벽하게 통제된 녹음 스튜디오 장면이 압도적으로 많을 텐데, 이 영화는 정반대의 선택을 했습니다.

댄과 그레타가 녹음하는 공간은 스튜디오가 아닙니다. 뉴욕의 좁은 골목,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보이는 루프탑, 지하철역 플랫폼이 그들의 무대입니다. 아이들이 공을 차는 소리, 경찰차 사이렌, 지하철이 덜컹거리는 소음까지 음악의 배경으로 흡수합니다. 처음 이 장면을 봤을 때 저는 "이게 말이 되나?" 싶었는데, 보면 볼수록 그게 이 영화의 가장 정직한 메시지라는 걸 알게 됩니다. 삶의 소음 자체가 음악이 될 수 있다는 것, 완벽한 조건이 아니어도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요.

이러한 연출 방식은 존 카니 감독의 전작 원스(Once, 2006)에서 이어지는 일관된 미학입니다. 원스가 더블린의 거리에서 핸드헬드 카메라로 거친 질감을 살렸다면, 비긴 어게인은 뉴욕이라는 대도시를 같은 방식으로 해석해 냈습니다. 제가 직접 두 영화를 비교해서 다시 봤을 때, 도시의 규모가 달라져도 감독이 말하는 핵심은 똑같다는 걸 느꼈습니다. 음악은 무대가 아니라 사람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Lost Stars 하나로 파악하는 사운드트랙의 구조

영화의 오리지널 사운드트랙(OST), 즉 영화를 위해 새롭게 작곡·녹음된 음악들을 분석하면 이 영화의 주제가 훨씬 선명하게 보입니다. 그중 애덤 러바인이 부른 Lost Stars는 단순한 삽입곡이 아니라 서사 구조 자체를 뒷받침하는 장치로 활용됩니다.

이 곡이 영화 안에서 두 번 등장한다는 점이 핵심입니다. 첫 번째는 그레타가 어쿠스틱 기타 하나만 들고 담백하게 부르는 버전, 두 번째는 그녀의 전 남자친구 데이브가 대형 공연장에서 화려한 편곡과 함께 부르는 버전입니다. 같은 곡인데 전혀 다른 감정이 전달됩니다. 제가 이 장면을 처음 봤을 때 느낀 감정은 솔직히 불편함이었습니다. 데이브의 버전이 화려하긴 한데 뭔가 공허했거든요. 그게 감독이 의도한 대비였다는 걸 나중에야 파악했습니다.

음악의 순수성(authenticity), 쉽게 말해 상업적 포장 없이 감정이 그대로 담겼는가의 여부가 두 버전의 차이를 만들어냅니다. 이 구조는 단순히 음악 취향의 차이가 아니라, 그레타가 대형 레이블의 제안을 거절하고 1달러 디지털 발매를 선택하는 마지막 결말과 직결됩니다. 그레타가 짓는 그 자유로운 미소가 제게 가장 오래 남은 이유가 바로 이 복선 덕분이었습니다. OST 구성을 보면 Love Is a Lie, Tell Me If You Wanna Go Home, Like a Fool 등도 각 인물의 감정 상태와 정확하게 맞물려 배치되어 있습니다.

음악과 감정의 관계를 다룬 연구에 따르면, 음악은 변연계(limbic system), 즉 감정과 기억을 처리하는 뇌 영역을 직접 자극하여 기분 전환과 감정 조절에 실질적인 영향을 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제가 지치거나 감정적으로 고갈되는 날 이 영화 OST를 틀면 기분이 바뀌는 경험을 반복했는데, 그게 기분 탓만은 아니었던 셈입니다. 음악이 인간의 심리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자료는 미국 국립보건원(NIH) 공개 논문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음악 치유라는 관점에서 본 두 인물의 서사

음악 치유(music therapy)란 음악을 매개로 신체적, 심리적, 사회적 기능을 회복하거나 향상시키는 치료적 접근을 뜻합니다. 임상 환경에서는 자격을 갖춘 치료사가 이를 진행하지만, 이 영화는 음악 치유의 본질적인 원리를 두 인물의 일상 속에서 굉장히 설득력 있게 보여줍니다.

그레타는 남자친구의 배신 이후 음악을 완전히 포기하려 했습니다. 창작 활동의 중단은 단순한 직업 포기가 아니라 자기 정체성의 붕괴에 가깝습니다. 반면 댄은 성공한 프로듀서였지만 가정이 무너지고 자신이 설립한 회사에서 해고당한 상태였습니다. 두 사람 모두 자존감(self-esteem), 즉 자신의 가치와 능력에 대한 긍정적 평가가 바닥을 친 상태에서 만납니다.

댄이 바에서 그레타의 노래를 듣는 장면이 이 영화 전체의 전환점입니다. 제가 이 장면에서 특히 좋아하는 연출이 있는데, 그레타가 노래를 시작할 때 텅 빈 무대가 댄의 상상 속에서 악기들로 가득 채워지는 시퀀스입니다. 그것이 댄의 청각적 상상력인 동시에, 그가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음악에 대한 열정이 되살아나는 순간을 시각화한 것이었거든요. 이 장면 하나로 두 인물의 치유가 동시에 시작된다는 설정이 너무 영리했습니다.

이 영화가 단순한 성공 스토리와 다른 점은 결말이 '대성공'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레타는 메이저 레이블 계약서에 서명하지 않습니다. 댄도 과거의 영광을 되찾지 못합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이 영화의 비긴 어게인, 즉 '다시 시작'이 의미하는 바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화려한 재기가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는 것이요.

음악 치료가 실제로 임상에서 어떻게 활용되는지 궁금하신 분은 미국 음악치료협회(AMTA)의 자료를 참고하면 도움이 됩니다.

12년이 지나도 이 영화가 여전히 유효한 이유

비긴 어게인은 2013년에 미국에서 개봉한 영화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2년 전 작품인데, 요즘도 인생 영화 목록에 자주 오릅니다. 저도 최근에 음악을 좋아하는 가족들과 함께 다시 봤는데, 처음 봤을 때와 다른 장면에서 마음이 걸렸습니다. 그레타가 Y잭 이어폰을 나눠 끼고 댄과 한밤중 뉴욕 거리를 걷는 장면이었습니다.

Y잭(Y-splitter)이란 하나의 이어폰 단자를 둘로 분기하는 어댑터입니다. 요즘은 블루투스 이어폰이 일반화되면서 이 소품 자체가 낯설게 느껴지는 시대가 됐지만, 그 장면이 주는 감각은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각자의 음악을 듣다가 하나의 음악을 함께 듣는다는 것, 그 행위가 두 사람의 관계를 설명하는 가장 정확한 은유였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가 지금도 유효한 이유를 정리하면 세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1. 음악의 순수성이라는 질문이 스트리밍 시대에 더 날카로워졌습니다. 그레타가 1달러 디지털 발매를 선택하는 장면은 2013년보다 지금 더 현실적인 선택지가 되었습니다.
  2. 뉴욕 야외 녹음이라는 설정이 콘텐츠 제작 방식의 변화와 맞닿아 있습니다. 스마트폰 하나로 음악을 기록하고 공유하는 지금 세대에게 오히려 더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읽힙니다.
  3. 비선형적 성장 서사가 주는 위로입니다. 요즘처럼 성과와 속도를 강조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화려한 재기가 아닌 자기 속도의 회복을 다룬 이야기는 더 필요한 메시지가 됩니다.

제가 이 영화를 다시 볼 때마다 다른 장면에서 멈추게 되는 이유가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상태에 따라 다른 장면이 말을 걸어오기 때문입니다. 그게 잘 만들어진 영화의 증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같은 화면인데 볼 때마다 다른 것이 보이는 작품이요.

비긴 어게인을 아직 보지 않으셨다면, 조건을 좀 갖춰서 보시길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