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밤에 혼자 영화를 보다가 그 자리에서 꼼짝도 못 한 경험이 있으신지요. 저는 그랬습니다. 창밖으로 찬바람 소리가 들리던 밤, 거실 불을 끄고 마주한 <레버넌트>는 처음 10분 만에 저를 완전히 19세기 미국 황야 한복판으로 데려다 놨습니다. 아들을 잃고 만신창이가 된 채 눈밭을 기어가는 한 남자의 이야기는, 단순한 복수극이 아니라 인간이 얼마나 질긴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기록 같았습니다.
생존의지 — 포기하고 싶은 순간에도 기어가는 사람
1823년 미주리 강 상류, 아직 지도에도 제대로 표시되지 않았던 그 황야에서 사냥꾼 휴 글래스는 회색 곰의 습격을 받습니다. 총을 꺼낼 새도 없이 온몸이 찢기고 물어뜯기는 장면은, 제가 직접 봤는데 솔직히 눈을 제대로 뜨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반송장이 된 글래스는 동료에게 버림받고, 아들이 눈앞에서 살해당하는 장면을 목격하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 무력함이 화면을 통해 그대로 전해져서 보는 저까지 숨이 막혔습니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결국 이 지점에 있다고 봅니다. 생존 본능(Survival Instinct)이란 단순히 살고자 하는 욕구가 아닙니다. 생존 본능이란 더 이상 버틸 이유가 없어 보이는 순간에도 몸이 먼저 움직이는, 인간 안에 깊이 박혀 있는 무언가를 말합니다. 글래스는 걷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팔로 땅을 기어 이동합니다. 극 중 그가 아들에게 했던 말, "폭풍이 와도 뿌리 깊은 나무는 쓰러지지 않는다"는 대사가 이 장면과 겹쳐질 때 저는 예상 밖으로 울컥했습니다.
매일 아이들에게 코딩을 가르치며 하루를 보내는 저의 일상이 글래스의 황야와 얼마나 다른지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영화를 보는 내내 이상하게 익숙한 감정이 들었습니다. 수업 준비가 안 풀리거나 블로그 글이 잘 써지지 않아 그냥 다 포기하고 싶은 날, 그런 날의 마음 상태가 저 눈밭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스케일은 비교도 안 되지만, 그래도 앞으로 기어가는 것 자체가 의미 있다는 걸 이 영화는 몸으로 보여줬습니다.
놀라운 건 이 이야기가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는 사실입니다. 실제 휴 글래스는 곰에게 공격당한 뒤 스스로 뼈를 맞추고, 상처에 구더기를 놓아 괴사한 살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살아남았다고 전해집니다. 6주 동안 약 320킬로미터를 이동해 돌아왔다는 기록은, 제가 아무리 찾아봐도 믿기 어렵지만 사실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이야기가 구전되고 알려지면서 그에게 "죽음에서 돌아온 자"라는 별명이 붙었고, 영화 제목 레버넌트(The Revenant)도 바로 그 뜻입니다. 레버넌트란 죽었다가 되돌아온 자, 또는 유령처럼 돌아온 존재를 뜻하는 영어 단어입니다.
자연광 촬영 — 화면 속 추위가 방 안까지 전해졌습니다
이 영화를 이야기하면서 촬영 방식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레버넌트>는 인공조명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오직 자연광(Natural Light)만으로 촬영된 작품으로 유명합니다. 자연광 촬영이란 태양이나 달 같은 자연에서 나오는 빛만을 광원으로 삼는 촬영 방식으로, 인위적인 조명 없이 현장의 빛을 그대로 담아내는 것을 말합니다. 덕분에 화면 속 빛은 시시각각 달라지고, 해 질 무렵 숲의 색감이나 새벽 눈밭의 차가운 질감이 스크린에서 살아 숨쉬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제가 이 영화를 거실에서 봤을 때 창밖 날씨가 공교롭게도 꽤 추운 밤이었는데, 화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 서늘한 공기감이 실제 바깥 추위와 겹쳐지면서 묘하게 몰입감이 배가됐습니다. 배우들의 입김이 렌즈에 맺히거나, 강물에 젖은 옷이 바람에 얼어붙는 질감 같은 것들이 그냥 '연출'이 아니라 '현장'으로 느껴졌습니다. 영화관에서 봤으면 더 압도적이었겠다 싶어 지금도 조금 아쉬운 부분입니다.
이 촬영을 맡은 이가 엠마누엘 루베스키(Emmanuel Lubezki)입니다. 그는 이 작품으로 아카데미 촬영상을 수상했는데, 놀라운 건 그것이 3년 연속 수상이었다는 점입니다. 2014년 <그래비티>, 2015년 <버드맨>, 그리고 2016년 <레버넌트>까지. 영화를 보면서 <그래비티>와 비슷한 느낌이 든다 싶었는데, 알고 보니 같은 촬영감독이었습니다. 광각 렌즈(Wide Angle Lens), 즉 넓은 화각으로 피사체에 근접해서 찍는 방식으로 인물의 표정과 감정을 화면 가득 담아낸 것도 이 영화의 특징 중 하나입니다. 광각 렌즈란 인간의 눈보다 더 넓은 범위를 한 화면에 담아내는 렌즈로, 가까이서 촬영할 때 인물이 크고 강렬하게 보이는 효과를 줍니다.
촬영 기법이 주는 효과를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 인공조명 없이 자연광만 활용해 황야의 실재감을 극대화했습니다.
- 롱테이크(Long Take), 즉 편집 없이 길게 이어지는 촬영 방식으로 관객을 현장 한가운데 밀어 넣었습니다.
- 광각 렌즈 근접 촬영으로 배우의 표정과 호흡을 날것 그대로 포착했습니다.
- 음악과 대사를 최소화하고 자연의 소리, 즉 숨소리, 물소리, 바람 소리를 크게 살려 몰입감을 높였습니다.
롱테이크(Long Take)란 카메라를 멈추거나 편집하지 않고 한 번에 길게 이어서 찍는 촬영 기법을 말합니다. 초반부 원주민 습격 장면과 곰과의 사투 장면에서 이 기법이 도드라지는데, 편집으로 속도감을 만들어내는 대신 그 불편하고 혼란스러운 시간을 관객이 고스란히 함께 버티게 만드는 방식이었습니다. 실제로 이 장면들은 영화 역사상 가장 실감나는 액션 시퀀스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출처: RogerEbert.com).
롱테이크가 만든 감정 — 복수보다 생존 과정이 더 강렬했습니다
영화를 보기 전에 저는 이 작품이 복수극일 거라 기대했습니다. 아들을 죽인 피츠제럴드를 향해 달려가는 이야기라고요. 그런데 직접 겪어보니 복수보다 생존하는 과정 자체가 훨씬 강렬하게 남았습니다. 피츠제럴드에 대한 분노가 글래스를 움직이는 동력이라는 건 맞지만, 사실 그가 살아남는 매 장면은 복수심 때문이라기보다 그냥 숨이 붙어 있어서 계속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거든요.
결말 처리에 대해서는 솔직히 고개가 조금 갸웃했습니다. 피츠제럴드를 향한 복수를 원주민들에게 떠넘기는 방식의 마무리는, 영화 내내 쌓아온 글래스의 감정선과는 다소 어긋나는 느낌이었습니다. 실제 휴 글래스도 돌아온 이후 피츠제럴드에게 복수를 행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영화가 그 실화의 결말을 따르면서 다소 어색한 봉합이 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연기는 말 그대로 압도적이었습니다. 대사가 많지 않은 역할인데도, 표정과 호흡만으로 고통의 밀도가 전해지는 장면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제 경험상 이렇게 대사 없이 감정이 전달되는 배우는 흔치 않습니다. 이 작품으로 그가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처음 수상했는데, 오랫동안 상복이 없기로 유명했던 만큼 그 수상이 더 반갑게 느껴졌습니다. 상복(賞福)이란 시상식에서 상을 받는 운이나 기회를 뜻하는 말로, 디카프리오는 그 이전까지 여러 차례 후보에 올랐음에도 수상하지 못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한편 실제 휴 글래스의 이야기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기록됐는지는 학계에서도 여전히 논의 중입니다. 구전되는 과정에서 일부 내용이 과장됐을 가능성도 있다고 하며, 영화 속 설정처럼 아들이 있었다는 기록도 실제로는 확인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런 역사적 사실에 관심 있으신 분들은 미국 역사 아카이브나 관련 연구 자료를 참고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출처: Smithsonian Magaz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