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레이싱 영화가 그냥 '빠른 차들이 달리는 영화'라고만 생각했습니다. 컴퓨터 교실에서 하루 종일 코딩을 가르치다 보면 논리와 정답에 익숙해지는데, 그날 거실에서 아이와 함께 본 <포드 V 페라리>는 그 고정관념을 완전히 깨버렸습니다. 자동차 엔진 소리가 심장 박동처럼 울리는 순간, 이건 속도가 아니라 사람 이야기라는 걸 직감했습니다.
양자택일이라는 함정, 우리는 왜 늘 하나만 고르려 할까
살면서 선택의 기로에 서는 순간이 생각보다 훨씬 많습니다. 짜장이냐 짬뽕이냐 같은 사소한 것부터, 이 직장을 계속 다니느냐 그만두느냐 같은 무거운 것까지. 저도 고민이 쌓이면 가장 큰 두 개를 꺼내서 먼저 해결할 것을 하나 고르는 방식을 자주 씁니다. 복잡한 걸 단순하게 요약하는 데 이만한 방법이 없거든요.
그런데 이 방법이 항상 옳은 건 아닙니다. 이분법적 사고(Binary Thinking)란 복잡한 현실을 두 가지 선택지로만 압축하는 인지 방식입니다. 쉽게 말해,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틀에 스스로를 가두는 습관이죠. 문제를 빠르게 단순화하는 데는 유용하지만, 그 틀 밖에 있는 제3, 제4의 답을 놓쳐버리는 부작용이 있습니다.
<포드 V 페라리>를 보고 나서 저는 이 함정을 제대로 인식하게 됐습니다. 영화 제목은 포드와 페라리를 맞붙이는 구도처럼 보이지만, 막상 영화를 보면 두 회사는 라이벌이 아닙니다. 대량 생산으로 더 많은 사람에게 자동차를 보급한 포드도, 자동차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페라리도 세상에 꼭 필요한 존재로 묘사됩니다. 어느 한쪽을 택하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이 시각이 저한테는 꽤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우리가 양자택일에 익숙한 이유 중 하나는 드라마 속 삼각관계나 스포츠 라이벌 구도처럼 미디어가 그 구조를 반복적으로 학습시켰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인지심리학에서는 이를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이라고 부릅니다. 확증 편향이란 이미 갖고 있는 믿음에 맞는 정보만 받아들이고 반대되는 정보는 무시하는 심리적 경향입니다. 보기가 두 개라고 해서 답도 두 개일 필요는 없다는 것, 이 영화가 은근히 던지는 메시지입니다.
라이벌 구도 뒤에 숨은 진짜 이야기, 캐롤 셸비와 켄 마일스
이 영화의 진짜 라이벌 구도는 캐롤 셸비(맷 데이먼)와 켄 마일스(크리스찬 베일) 사이에 있습니다. 제가 처음 봤을 때는 두 사람이 자꾸 치고받고 싸우니까 당연히 경쟁 관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영화가 끝나고 나서 돌아보니, 두 사람은 한 번도 서로를 짓밟으려 한 적이 없었습니다.
르망 24시간 레이스(24 Heures du Mans)란 프랑스 르망 서킷에서 24시간 동안 가장 많은 거리를 주행한 팀이 이기는 내구 레이스입니다. 단순히 빠른 차가 이기는 게 아니라 차와 드라이버 모두 24시간을 버텨내야 하는, 체력과 전략과 기술이 동시에 필요한 경주입니다. 1966년 이 레이스에서 페라리를 꺾겠다는 목표 아래 포드가 고용한 두 사람이 셸비와 마일스였습니다.
켄 마일스는 포드 경영진 입장에서 통제하기 어려운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이 옳다고 판단하면 회사 지시보다 차의 성능을 먼저 따졌거든요. 그때 셸비가 이렇게 말합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게 뭐냐고 물었죠? 운전대 뒤에 있는 순수한 레이서. 그게 바로 켄 마일스예요." 저는 이 대사에서 10살 아이한테 엔진 설명을 해주던 그날 밤이 겹쳤습니다. 좋아하는 것에 순수하게 미쳐있는 사람이 결국 가장 멀리 가더라고요.
두 사람의 관계를 단순한 우정이나 경쟁으로만 분류하기 어려운 이유는, 서로가 가진 것의 성질이 완전히 달랐기 때문입니다. 셸비는 르망 우승 경력이 있지만 더 이상 레이싱을 할 수 없는 상태였고, 마일스는 셸비가 더 이상 느낄 수 없는 '속도 안에서의 순수한 집중'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가 가지지 못한 것을 진심으로 존경했습니다. 그게 이 관계를 특별하게 만든 핵심입니다.
영화 속에서 켄 마일스가 아들에게 설명하는 '퍼펙트 랩(Perfect Lap)' 장면이 있습니다. 퍼펙트 랩이란 레이스에서 가능한 모든 코너와 직선 구간을 최상의 판단으로 주행한 완벽한 한 바퀴를 뜻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빨리 달리면 차의 속도는 올라가지만 나머진 모두 느려져. 기계를 한계까지 밀어붙이면서 버텨주길 바라려면 한계가 어디인지 알아야 해." 코딩을 가르치면서 종종 아이들에게 비슷한 말을 합니다. 네가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정확히 알아야 제대로 짤 수 있다고요. 이 대사가 그래서 더 깊이 박혔습니다.
퍼펙트 랩의 조건, 우리에게 필요한 두 가지 태도
이 영화가 단순한 레이싱 영화로 끝나지 않는 이유는, 셸비와 마일스를 대비시키면서 결국 우리에게 두 가지 모두 필요하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저도 처음에는 '켄 마일스 같은 사람이 되어야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순수하고 타협 없는 사람. 그런데 직장에서, 팀 프로젝트에서 돌아보니 셸비의 유연함 없이는 아무것도 실제로 굴러가지 않더군요.
영화에서 셸비와 마일스가 보여준 협업 방식을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 서로의 재능을 시기하지 않고 인정한다. 셸비는 마일스의 운전 본능을, 마일스는 셸비의 협상력과 경험을 존중했습니다.
- 목표는 공유하되 방법은 서로 다를 수 있음을 허용한다. 두 사람은 수시로 싸웠지만 방향은 늘 같았습니다.
- 상대방의 궤도를 존중하는 선택을 한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마일스가 하는 선택은, 셸비의 삶 전체를 이해한 사람만이 내릴 수 있는 결정이었습니다.
영화의 사운드 디자인(Sound Design)도 이 주제를 뒷받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사운드 디자인이란 영화 속 음향 효과 전체를 설계하는 작업으로, 이 영화에서는 CG에 의존하지 않고 실제 레이싱카를 제작해 촬영한 덕분에 엔진 굉음과 타이어 마찰음이 압도적인 현장감을 줍니다. 제가 거실 TV로 봤을 때도 그 소리가 몸으로 전해지는 느낌이 있었는데, 극장에서 봤다면 정말 다른 경험이었을 것 같습니다.
이 영화는 2020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편집상과 음향편집상을 수상했습니다. 영화 전문 매체인 로튼 토마토(Rotten Tomatoes)에서도 신선도 92%를 기록하며 평단과 관객 모두에게 고르게 호평을 받은 작품입니다. 단순히 자동차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어도, 자기 일에 진심을 다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영화에서 분명히 건질 장면이 생깁니다.
미장센(Mise-en-scène)이란 화면 안에 배치된 모든 시각적 요소, 즉 배우의 위치, 조명, 소품, 배경까지를 연출 의도에 맞게 구성하는 것을 뜻합니다. 제임스 맨골드 감독은 레이스 장면에서 켄 마일스의 얼굴 클로즈업과 계기판, 타이어 접지 장면을 번갈아 편집해 관객이 운전석 안에 앉아있는 감각을 느끼도록 설계했습니다. 이 연출 덕분에 자동차를 모르는 사람도 마일스가 느끼는 '7,000 RPM의 경지'에 같이 도달하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결국 이 영화가 저한테 준 건 하나의 메시지였습니다. 보기가 두 개일 때 답이 하나일 필요는 없다는 것. 1번도, 2번도, 혹은 둘 다도, 혹은 둘 다 아닌 것도 답이 될 수 있습니다. <포드 V 페라리>를 아직 안 보셨다면, 레이싱에 관심이 없어도 괜찮으니 한번 틀어보시길 권합니다. 그리고 셸비와 마일스 중 누구에게 더 감정이입이 되는지 느껴보세요. 그 답 안에 지금 자신이 삶에서 무엇을 더 필요로 하는지가 들어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