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계인 영화를 보러 갔다가 아파르트헤이트 고발 다큐멘터리를 보고 나온 기분, 혹시 느껴보신 적 있습니까? 저는 처음 디스트릭트 9을 봤을 때 정확히 그랬습니다. 예고편만 보고 "외계인 액션 영화겠지"라고 가볍게 켰다가, 화면이 끝나고 한참 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2009년 개봉작임에도 지금 다시 봐도 전혀 낡지 않은 이 영화가 왜 SF 장르의 이정표로 불리는지, 그 구조를 하나씩 뜯어보겠습니다.
다큐멘터리 형식이 만들어낸 공포
보통 외계인 영화라고 하면 뭔가 거대하고 화려한 침공 장면이 먼저 떠오릅니다. 그런데 디스트릭트 9은 시작부터 완전히 다릅니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뉴스 앵커 인터뷰, 전문가 코멘트, CCTV 화면이 뒤섞이면서 마치 실제 사건을 취재한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듭니다.
이 기법을 파운드 푸티지(Found Footage)라고 합니다. 파운드 푸티지란 실제로 촬영된 영상이나 기록물을 발견해 편집한 것처럼 연출하는 방식인데, 핸드헬드 카메라 특유의 흔들림과 거친 화질이 현실감을 극단적으로 높여줍니다. 블레어 위치처럼 공포 장르에서 주로 쓰이던 이 형식을 SF에 정면으로 이식했다는 점이 닐 블롬캠프 감독의 가장 큰 도전이었습니다.
배경이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라는 점도 이 리얼리티를 강화합니다. 실제로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즉 남아공이 1948년부터 1994년까지 시행한 인종 분리 정책의 역사가 살아있는 도시에, 외계인 격리구역인 디스트릭트 9을 그대로 겹쳐놓은 겁니다. 저는 이 설정을 알고 나서 다시 봤을 때 영화의 무게가 완전히 달라 보였습니다. 외계인들이 살고 있는 판자촌, 쓰레기 더미, 그리고 그들을 향한 노골적인 경멸이 그냥 SF적 상상이 아니라 실제 역사를 반영한 거였으니까요.
외계인 비행선이 도시 상공에 나타난 지 3개월이 지나도록 아무 일도 없자, 인간이 먼저 비행선 안으로 강제 진입합니다. 안에는 영양실조로 쓰러진 외계인들만 가득했고, 남아공 정부는 이들을 디스트릭트 9이라는 수용구역에 몰아넣습니다. 28년이 지나도록 그 상태가 유지됩니다. 이 설정이 무서운 이유는 침략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피해자만 있는데 피해가 계속되는 구조, 그게 이 영화의 핵심입니다.
참고로 이 작품은 닐 블롬캠프 감독의 단편 얼라이브 인 요하네스버그를 장편으로 확장한 것으로, 피터 잭슨이 제작을 맡았습니다. 당시 제작비 약 3,000만 달러로 전 세계 박스오피스 2억 1천만 달러를 넘기며(출처: Box Office Mojo) 저예산 SF의 가능성을 완전히 다시 썼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외계인 비하와 역지사지, 비커스가 걸어간 길
주인공 비커스 메르바는 영화 초반에 솔직히 말해서 그다지 마음에 드는 인물이 아닙니다. 외계인 관리국 MNU 소속으로, 외계인들을 다른 구역으로 이주시키기 위해 서명을 받아오는 작전을 지휘하는 인물인데, 외계인을 대하는 태도가 거칩니다. 사람들이 외계인을 '프론(Prawn)'이라고 부르는데, 이 단어는 단순히 곤충처럼 생긴 외형에서 나온 별명이 아닙니다.
프론이란 표현은 외계인에 대한 혐오와 멸시를 담은 비하 용어(Slur)입니다. 비하 용어란 특정 집단을 낮춰보는 의도가 담긴 언어적 폭력으로, 이 영화에서는 외계인을 향한 인간의 뿌리 깊은 차별 의식을 상징하는 장치로 기능합니다. 비커스도 처음에는 이 언어를 아무렇지 않게 씁니다.
그런 그가 현장 작전 중 외계인 크리스토퍼 존슨이 모아둔 유동체에 노출되면서 신체가 변하기 시작합니다. 검은 코피, 빠지는 손톱과 이빨, 외계인의 것으로 변해가는 팔. MNU는 그를 납치해 생체 실험 대상으로 삼습니다. 외계인 DNA에만 반응하는 고도의 무기 시스템을 작동시킬 수 있는지 확인하려는 거였습니다. 어제까지 시스템의 집행자였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시스템이 소비하는 재료가 되어버리는 장면은 보면서도 믿기가 어려웠습니다.
이후 비커스가 크리스토퍼와 손을 잡고 MNU 건물을 급습하는 장면에서, 크리스토퍼는 인간이 외계인들에게 얼마나 잔혹한 생체 실험을 해왔는지 처음으로 목격합니다. 그 순간 크리스토퍼의 표정 연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분노인지 절망인지 구분이 안 되는 얼굴이었는데, 대사 한 마디 없이도 외계인이 인간보다 더 인간적으로 느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샬토 코플리는 이 역할로 단숨에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습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으로, 이후 A-특공대와 올드보이 미국 리메이크에도 출연했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비커스 역이 그의 최고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찌질하고 비겁하고 이기적인 인물이 아주 천천히, 억지로 끌려가듯 인간다워지는 과정을 이렇게까지 설득력 있게 연기한 배우를 그 이후로 많이 보지 못했습니다.
엑소슈트 전투씬과 마지막 철사 장미가 남긴 것
이 영화가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을 받은 이유는 충분합니다. 외계인 무기에 맞은 인간이 순식간에 산산조각이 나고, 신체 절단 묘사가 직접적으로 등장합니다. 잔인한 장면이 불편하신 분들은 보기 전에 미리 알아두시는 게 좋습니다.
그 잔인함의 정점이 바로 엑소슈트(Exosuit) 전투씬입니다. 엑소슈트란 착용자의 신체 능력을 기계적으로 증폭시키는 동력 외골격 장치를 뜻하는데, 비커스가 이 슈트에 탑승해 MNU 군인들과 맞붙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압도적인 액션 시퀀스입니다. 그런데 단순한 스펙터클로 끝나지 않습니다. 비커스가 이 슈트를 탈 수 있는 이유는 이미 그의 신체가 외계인으로 변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외계 기술은 외계인 DNA에만 반응하니까요. 결국 그가 강해질수록, 그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는 역설이 그 장면에 담겨 있습니다.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장면을 고르라면 사실 액션씬이 아닙니다. 마지막, 완전히 외계인의 모습으로 변해버린 비커스가 쓰레기 더미 속에서 철사로 장미꽃을 만드는 장면입니다. 아내에게 주려고 만드는 꽃이라는 게 영화가 명시하지 않아도 느껴지는데, 그 단순한 행위 하나가 그 어떤 대사보다 많은 것을 말해줍니다. 외모는 완전히 달라졌지만, 그 안에 남아있는 인간의 흔적. 저는 그 장면에서 눈물이 났습니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핵심 메시지를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 차별과 혐오는 피해자와 가해자를 고정하지 않는다. 어제의 집행자가 오늘의 실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 인간성은 종(種)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다. 가장 인간적인 행동을 한 건 끝내 외계인 부자(父子)였습니다.
- 시스템은 약자를 만들어낸다. MNU라는 거대 기관은 나쁜 개인이 아니라 나쁜 구조의 산물임을 영화는 일관되게 보여줍니다.
아파르트헤이트 역사를 다루는 자료를 찾아보면(출처: United Nations - Fight Against Apartheid) 이 영화가 단순한 SF가 아니라 실제 역사적 상처를 직접 겨냥한 작품임을 더 선명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배경이 요하네스버그인 것도, 외계인들이 판자촌에 28년째 갇혀있는 것도, 모두 그 역사의 언어로 쓰인 문장들입니다.
디스트릭트 9은 2009년 영화지만 지금 보면 오히려 더 날카롭게 느껴지는 작품입니다. 세상이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는 증거일 수도 있고, 영화 자체가 그만큼 보편적인 언어로 만들어졌다는 방증일 수도 있습니다. 아직 보지 않으셨다면, 액션 영화를 기대하고 보셔도 됩니다. 다만 끝나고 나서 한동안 조용히 있게 될 수도 있다는 점은 미리 말씀드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