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 일요시네마에서 오랜만에 다시 만난 영화 한 편이 생각보다 오래 마음에 걸렸습니다. 1992년작 로버트 레드포드 감독의 <흐르는 강물처럼>입니다. 두세 번은 봤을 텐데도 볼 때마다 다른 대목에서 걸립니다. 이번에는 유독 "완전히 이해할 수 없어도 완전히 사랑할 수는 있습니다"라는 맥클레인 목사의 설교 한 줄이 오래 남았습니다.
폴의 캐릭터, 어떻게 볼 것인가
영화를 처음 보는 분들은 동생 폴(브래드 피트 분)을 단순히 자유로운 영혼으로 읽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도 처음 봤을 때는 그랬습니다. 그런데 몇 번을 거듭 보다 보면 폴이라는 인물이 단지 낭만적인 반항아가 아니라는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폴의 행동들을 구체적으로 짚어 보면, 그건 단순한 자유가 아닙니다. 귀리수프를 끝내 거부하고, 누가 봐도 위험한 급류에서 보트를 타자고 제안하고, 형이 정어리를 싫어한다는 말을 무시한 채 식빵에 끼워 눌러줍니다. 타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자신의 열정만이 우선입니다. 저는 이걸 낭만으로 읽기보다는, 어딘가 소통 회로가 끊긴 사람의 모습으로 읽게 됩니다.
폴을 '예술적 자아(Artistic Self)'로 해석하는 시각도 있습니다. 예술적 자아란 사회적 규범보다 자신의 내적 충동에 더 충실한 인격 유형을 가리키는 개념입니다. 그 관점에서 보면 폴의 행동은 파괴가 아니라 창조입니다. 아버지가 가르쳐준 플라이 캐스팅(Fly Casting), 즉 낚싯줄을 공중에 날려 목표 지점에 정확히 안착시키는 플라잉낚시 기술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자기만의 리듬을 개발해 형보다 큰 송어를 낚는 장면이 그 상징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 해석이 절반만 맞다고 봅니다. 아름다운 순간은 분명히 있지만, 그 아름다움이 폴을 살게 하지는 못했으니까요.
폴을 보며 가장 불편했던 장면은 도박 빚 때문에 결국 밤거리에서 맞아죽는 결말입니다. 아직 20대. 폴이 출입하던 포커 판은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그의 자멸적(Self-Destructive) 충동, 즉 스스로를 위험한 상황으로 몰아넣는 반복적인 패턴의 일부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걸 예술적 기질로만 포장하는 건 좀 무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족애라는 단어가 쉽게 닿지 않는 이유
영화의 주제를 가족애로 읽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도 그 독해에 동의하지만, 이 영화의 가족애는 따뜻하고 포근한 것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차라리 무력감에 가깝습니다.
제시 번스의 대사 "왜 도움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거절할까요?"는 제시 오빠 닐 번스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결국 폴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 질문에 대해 영화는 끝까지 답을 주지 않습니다. 그 침묵이 오히려 정직하다고 느꼈습니다. 가까운 사람을 돕고 싶어도 그 방법을 모르거나, 방법을 알아도 상대가 받아들이지 않는 상황은 현실에서도 드문 일이 아닙니다. 저도 주변에서 비슷한 상황을 보면서, 도움을 거절하는 사람에게 화가 나다가도 나중에는 그 거절이 무엇을 뜻하는지 오래 생각하게 된 경험이 있습니다.
맥클레인 목사가 임종 전 마지막 설교에서 남긴 말,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어도 완전히 사랑할 수는 있습니다"는 자주 인용되는 명대사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말이 때로는 너무 빨리 소비된다는 생각도 합니다. 이 말이 위로가 되려면, 이해하려는 시도가 충분히 먼저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해 시도 없이 바로 "사랑하면 된다"로 가는 건, 어찌 보면 편한 회피일 수 있습니다. 물론 영화 속 노먼과 아버지가 그런 경우라는 말은 아닙니다. 이 대사를 너무 쉽게 소비하는 우리 쪽 이야기입니다.
경찰서를 다녀온 노먼이 아버지에게 폴의 오른손뼈가 완전히 부서졌다고 전하자, 아버지가 침묵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원작 소설을 읽은 분들의 설명에 따르면, 아버지는 폴이 묶인 채 속절없이 당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하다 죽었음을 그 손을 통해 확인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 장면을 처음 봤을 때는 의미를 몰랐는데, 나중에 알고 나서 다시 떠올리니 가슴이 묵직해졌습니다. 그렇게라도 아들의 마지막에서 위안을 찾아야 하는 부모의 심정이라니.
이 영화에서 가족을 둘러싼 핵심 감정들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이해하고 싶지만 이해할 수 없는 무력감 — 노먼과 아버지가 폴을 향해 느끼는 감정의 핵심입니다.
- 도움을 주려 해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단절감 — 제시의 오빠 닐 번스, 그리고 폴에게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패턴입니다.
- 기억을 통한 복원 — 함께한 플라잉낚시의 시간이 없었다면, 이 가족 이야기는 아예 복원될 관계 자체가 없었을 것입니다.
- 아름다움을 통한 위안 — 폴을 아름답게 기억하려는 노력은, 고통을 감당 가능하게 만드는 방어 기제(Defense Mechanism)이기도 합니다.
방어 기제란 심리학 용어로,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이나 현실을 무의식적으로 변형·회피하여 자아를 보호하는 심리 작용을 뜻합니다. 폴을 아름다운 존재로 기억하는 것이 거짓이 아니라, 그래야만 살아갈 수 있는 가족의 방식인 셈입니다.
플라잉낚시가 이 영화에서 하는 일
영화의 미장센(Mise-en-scène)을 두고 오스카 촬영상을 받은 작품답다는 평이 많습니다. 미장센이란 화면 안에 배치된 모든 시각 요소, 즉 조명, 구도, 배우의 동선, 색감 등의 총체를 가리키는 영화 용어입니다. 이 영화의 미장센은 실제로 압도적입니다. 몬태나주 블랙풋 강 위로 부서지는 햇살, 그 위에서 허공을 가르는 낚싯줄의 궤적은 단순한 배경이 아닙니다.
플라잉낚시, 정확히는 플라이 피싱(Fly Fishing)은 인조 미끼를 물 위에 자연스럽게 착지시켜 물고기를 유인하는 낚시 방식입니다. 무게가 거의 없는 미끼 대신 줄 자체의 무게를 이용해 캐스팅(casting)을 하기 때문에, 리듬감과 타이밍이 중요합니다. 맥클레인 목사가 아들들에게 가르친 '네 박자 리듬'은 그 핵심 기술입니다. 그리고 폴은 그 규칙을 스스로 깨고 자기만의 리듬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영화의 주제와 겹치는 지점입니다.
플라이 피싱이 1920년대 미국 몬태나 지역 문화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했는지에 대해서는 몬태나 관광청(Visit Montana)의 자료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이 지역은 오늘날에도 세계적인 플라이 피싱 성지로 꼽힙니다. 블랙풋 강은 실제로 원작자 노먼 맥클레인이 낚시를 했던 강이기도 합니다.
흥미로운 건, 플라이 피싱이 이 영화에서 단순한 소품이 아니라 세대 간의 내러티브 연결고리(Narrative Connector) 역할을 한다는 점입니다. 내러티브 연결고리란 이야기 속에서 서로 다른 사건이나 인물을 하나의 주제로 묶어주는 장치를 말합니다. 아버지와 두 아들이 함께 낚시를 한 시간이 없었다면, 이 영화는 회상할 공통 기억 자체가 없었을 것입니다. 노년의 노먼이 이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건, 바로 그 강에서의 시간 덕분입니다.
영화 속 노먼의 독백 중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그 순간 깨달았다. 인생은 예술작품이 아니고, 순간이 영원한 것도 아니라는 걸." 월척을 낚은 동생을 보며 한 말입니다. 저는 이 문장이 이 영화 전체에서 가장 솔직한 문장이라고 생각합니다. 폴의 그 찬란한 순간은 아름다웠지만, 영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걸 아는 노먼의 시선은 찬미이면서 동시에 애도입니다. 노먼 맥클레인이 시카고대 영문학과 교수로 평생을 보내고 노년에 단 한 권의 책을 남겼다는 사실이, 이 영화의 회상적이고 관조적인 톤과 정확히 맞물립니다. 인생의 후반부에서야 겨우 이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던 것 아닐까 싶습니다. 그 정도로 오래 안고 살아온 이야기라는 뜻이기도 하고요. 영화를 보고 싶으신 분들은 EBS 홈페이지에서 방영 일정을 확인해 보세요 강력 추천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