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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리오 (미장센, 도덕적딜레마, 베니시오델토로)


영화가 마약 카르텔 액션물이겠거니 하고 넘겼습니다. 그런데 오프닝 시퀀스가 끝나고 나서 리모컨을 내려놓지 못했습니다. 드니 빌뇌브 감독의 2015년작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는 선과 악 중 어느 쪽의 손도 들어주지 않는 영화입니다. 그게 이 영화가 불편하고, 동시에 잊히지 않는 이유입니다.

멕시코 국경 지대, 이 영화가 만들어진 맥락

시카리오(Sicario)는 스페인어로 '암살자'를 뜻합니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미국-멕시코 국경 지대, 특히 후아레스(Ciudad Juárez)는 2000년대 중반부터 마약 카르텔 간의 영역 다툼으로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도시 중 하나로 꼽혔습니다. 당시 이 도시의 살인율은 인구 10만 명당 300명을 넘기도 했습니다. 단순한 배경 설정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나고 있던 현실이었다는 얘기입니다.

이 영화가 나온 2015년 전후로, 미국 DEA(마약단속국, Drug Enforcement Administration)와 각국 정보기관이 카르텔 수뇌부를 잡기 위해 얼마나 비정상적인 방법을 동원했는지에 대한 보도들이 쏟아지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영화의 각본가 테일러 셰리던은 그 회색 지대를 그대로 끌어당겨 스크린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저는 컴퓨터 교실에서 아이들에게 규칙과 정답이 명확한 코딩을 가르치는 사람인데, 이 영화가 보여주는 '규칙이 없는 세계'는 그래서 더 서늘하게 느껴졌습니다.

영화의 주인공 케이트(에밀리 블런트 분)는 FBI 요원입니다. 그녀는 법의 테두리 안에서 일하고, 그 원칙을 신뢰합니다. 그런데 그녀가 투입된 작전에는 신분도 목적도 모호한 두 남자가 있습니다. CIA 요원 맷 그레이버(조슈 브롤린 분)와, 정체를 알 수 없는 알레한드로(베니시오 델 토로 분). 케이트는 작전 내내 "이게 맞는 건가?"를 묻지만, 아무도 제대로 된 대답을 주지 않습니다. 혹시 당신도 살다가 그런 순간 있지 않았습니까?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이 현실에서는 아무 힘도 없다는 걸 깨닫는 그 순간 말입니다.

영화는 또한 카르텔 내부의 이면성을 꽤 집요하게 들여다봅니다. 낮에는 아들과 축구를 하는 아버지이지만 밤에는 마약 운반책이 된 부패 경찰, 온갖 잔혹한 일을 저지르면서도 가족 앞에서는 평범한 가장의 얼굴을 하는 카르텔 수장. 그 이중성은 단순히 '악인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려는 게 아닙니다. 이 영화는 그 이중성이 얼마나 보편적인지를 묻고 있습니다.

미장센과 사운드가 만든 압도적 긴장감의 구조

이 영화를 이야기할 때 미장센(mise-en-scène)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미장센이란 화면 안에 배치되는 모든 시각적 요소, 즉 조명, 구도, 배우의 동선, 색감 등을 통해 장면의 의미와 감정을 설계하는 영화적 기법입니다. 드니 빌뇌브 감독과 세계적인 촬영감독 로저 디킨스가 이 영화에서 선택한 색감과 구도는 정말이지 교과서에 실려도 될 수준입니다.

특히 제가 직접 보면서 가장 강렬했던 장면은 후반부, 붉게 물든 석양을 배경으로 실루엣만 남은 요원들이 일렬로 땅굴을 향해 내려가는 시퀀스입니다. 색이 서서히 사라지고 어둠이 그들을 삼켜가는 그 흐름이, 말 한마디 없이도 "이들은 이미 도덕의 경계를 넘었다"는 걸 보여줍니다. 로저 디킨스는 IMDB 로저 디킨스 프로필에서 확인할 수 있듯 이 작품으로 아카데미 촬영상 후보에 오른 바 있습니다.

사운드 디자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고(故) 요한 요한슨이 작곡한 사운드트랙은 일반적인 스릴러 음악처럼 긴장감을 '올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낮은 베이스 톤이 아주 천천히 깔리면서 관객의 심장박동 자체를 바꾸어 놓습니다. 저는 거실 조명을 끄고 혼자 봤는데, 어느 순간부터 등받이에서 등을 떼고 앉아 있는 제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영화 음악이 신체 반응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몸으로 확인한 날이었습니다.

국경 검문소 차선 대치 시퀀스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이 장면은 총 한 발 없이 긴장감이 극에 달하는, 제가 본 스릴러 영화 중 가장 효율적인 서스펜스 구성입니다. 제한된 공간, 피할 수 없는 충돌, 그리고 누가 카르텔 조직원인지 알 수 없다는 불확실성이 겹치면서 화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습니다. 이 영화가 단순한 '킬링 타임용' 첩보물이 아닌 이유가 바로 이런 장면에 있습니다.

이 영화가 시각적, 청각적으로 탁월한 이유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로저 디킨스의 촬영: 한낮의 건조한 햇빛과 야간 투시경(Night Vision)의 초록빛을 번갈아 사용해 공간의 낯섦을 극대화했습니다. 야간 투시경이란 빛이 없는 환경에서 열 또는 미세 빛을 증폭해 사물을 보는 군사·정보기관 장비로, 이 영화에서는 관객을 철저한 관찰자의 시점에 고정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2. 요한 요한슨의 사운드트랙: 선율보다는 진동에 가까운 저음역 사운드로 심리적 압박을 설계했습니다. 특히 'The Beast'는 BGM이라기보다 불안감 그 자체처럼 들립니다.
  3. 땅굴 시퀀스의 공간 연출: 좁고 어두운 밀폐 공간(enclosed space)을 카메라가 따라가며 불안감을 고조시키고, 전투 장면의 긴장감을 배가시킵니다.
  4. 인물들의 실루엣 활용: 대사나 표정 없이 실루엣과 역광만으로 캐릭터의 상태를 표현합니다. 알레한드로의 마지막 복수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베니시오 델 토로, 그리고 이 영화가 던지는 진짜 질문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베니시오 델 토로를 그다지 각별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알레한드로라는 캐릭터를 보고 나서 완전히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이 남자가 대사를 얼마나 아끼는지 알면 더 놀랍습니다. 말 대신 눈빛과 걸음걸이로 모든 감정을 전달하는데, 그게 오히려 더 무겁고 섬뜩하게 다가옵니다.

알레한드로는 카르텔에 의해 가족을 잃은 인물입니다. 그는 CIA의 도구가 되어 카르텔 수뇌부를 추적하고, 결국 사적 심판(private justice)을 집행합니다. 사적 심판이란 공식적인 법 절차 없이 개인이 스스로 응보를 행하는 것을 말하며, 이는 법치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영화를 보는 내내 저는 그를 악인으로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게 이 영화의 가장 불편한 부분입니다.

케이트는 끝까지 법의 편에 서려 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합니다. 방아쇠를 당기지 못하고, 서명도 거부하지만, 시스템은 그녀 없이도 굴러갑니다. 이 결말이 무기력하게 느껴진다면, 그게 바로 드니 빌뇌브 감독이 의도한 것입니다. Rotten Tomatoes 시카리오 리뷰 페이지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이 영화는 비평가 지지율 93%를 기록하며 "도덕적 질문을 던지는 방식에서 독보적"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권선징악(勸善懲惡)이란 선을 권하고 악을 징벌한다는 뜻으로, 대부분의 할리우드 장르 영화가 암묵적으로 따르는 서사 공식입니다. 시카리오는 그 공식을 정면으로 거부합니다. 복수는 복수를 낳고, 또 다른 시카리오는 어디서든 등장합니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어느 쪽 손을 들어줄 수 없다면, 당신은 이 영화를 제대로 본 것입니다.

아이들이 총성 아래서도 태연하게 공을 차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 익숙함의 무서움을 저는 아직도 지우지 못했습니다. 일상이 된 폭력, 무감각해진 공포. 그건 멀리 있는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