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시작하면서 화면이 켜지자 총성보다 고요함이 먼저 찾아왔고, 어느 순간 시저의 눈빛 앞에서 제가 완전히 무너져 있었습니다. 맷 리브스 감독의 2017년작 혹성탈출: 종의 전쟁은 제작비 1억 5천만 달러를 투입해 전 세계 3억 1천 3백만 달러의 흥행을 기록한 작품입니다. 해외 평점 7.9점. 숫자만 봐도 범상치 않지만, 정작 이 영화가 남기는 건 수치로 환산되지 않는 것들입니다.
욕망이라는 바이러스, 시저와 대령의 거울 구조
영화에서 가장 먼저 포착한 것은 시저(앤디 서키스 분)와 대령(우디 해럴슨 분)이 사실상 동일한 구조 위에 놓여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시저는 아내와 자녀를 대령의 손에 잃고 복수라는 단 하나의 목표로 홀로 그를 쫓습니다. 대령은 바이러스로 언어를 잃어가는 인간들을 더 이상 인간으로 보지 않고 처단해 왔습니다. 방향은 달라도 두 존재 모두 증오라는 감정의 노예입니다.
여기서 영화가 사용하는 서사 장치가 바로 데칼코마니(Decalcomanie) 구조입니다. 데칼코마니란 두 이미지가 서로를 반영하며 대칭을 이루는 구성을 뜻합니다. 시저가 감옥에 갇힌 유인원들을 바라보며 "난 아직도 증오에서 못 빠져나왔다"고 고백하는 장면은, 자신이 혐오하던 코바와 대령의 모습이 자신 안에도 있음을 인정하는 순간입니다. 제가 이 장면에서 멈칫했던 건, 그 고백이 너무 인간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대령이 부하들 앞에서 머리를 미는 장면도 예사롭게 넘길 수 없었습니다. 이는 스킨헤드(Skinhead) 이미지를 직접 차용한 연출입니다. 스킨헤드란 특정 이념에 맹목적으로 복종하며 타자를 배제하는 극단적 집단주의의 상징으로 쓰이는 표현입니다. 술에 절어 있는 대령의 모습까지 더하면, 감독은 그를 욕망과 편협함이 극단에 달한 인물로 명확히 설계한 것입니다. 흥미로운 건 그의 아들 역시 그 바이러스에 감염되었고, 결국 대령 스스로 그 아들을 처단했다는 설정입니다. 욕망이 자신의 미래, 즉 자녀까지 죽음으로 내몬 것이지요.
영화 곳곳에 등장하는 "APE-OCALYPSE NOW"라는 표식은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지옥의 묵시록(Apocalypse Now, 1979)을 직접 인용한 것입니다. 지옥의 묵시록은 전쟁터라는 극한 상황에서 인간 내면의 어둠과 욕망이 어떻게 폭발하는지를 그린 작품으로, 커츠 대령이라는 인물을 통해 문명과 야만의 경계를 해체합니다. 우디 해럴슨이 연기한 대령은 그 커츠 대령의 21세기 버전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제 경험상 이런 식의 오마주는 단순한 팬서비스가 아니라, 영화가 전달하려는 철학적 맥락을 강화하는 장치로 작동할 때 가장 빛납니다. 이 작품이 정확히 그렇습니다.
희생의 의미, 그리고 노바가 상징하는 것
시저의 여정이 복수에서 희생으로 전환되는 중간에 작은 인물 하나가 놓여 있습니다. 말을 잃은 인간 소녀 노바(아미아 밀러 분)입니다. 바이러스로 언어 능력을 상실한 노바는 쇠창살 사이로 들어와 시저에게 물을 건네고 머리에 꽃을 꽂아줍니다. 대사 한 마디 없는 이 장면이 영화에서 가장 감정적으로 강렬한 이유는, 노바가 단순한 조연이 아니라 영화의 주제를 온몸으로 체현하는 상징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노바가 잃은 것은 단순한 언어가 아닙니다. 감정을 표현하는 수단이자, 타인과 연결되는 통로입니다. 그런데 이 소녀는 수화(手話)라는 또 다른 언어를 배워 유인원들과 소통합니다. 수화란 음성 언어 대신 손과 표정으로 의미를 전달하는 시각적 언어 체계를 뜻합니다. 잃어버린 방식 대신 새로운 방식으로 연결을 찾아낸 것, 저는 이것이 영화가 말하는 사랑의 실체라고 생각합니다. 언어가 없어도 감정은 전달된다는 것, 그리고 그 감정이 미래를 만든다는 것.
이와 유사한 서사 구조는 2016년 애니메이션 목소리의 형태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청각장애를 가진 주인공이 언어의 장벽을 넘어 타인과 연결되는 이야기인데, 두 작품 모두 "소통의 방식이 달라도 감정은 닿는다"는 메시지를 공유합니다. 이런 작품들을 보고 나면, 컴퓨터 교실에서 아이들에게 데이터와 숫자를 가르칠 때도 결국 가장 중요한 건 그 데이터 뒤에 있는 감정과 의도라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됩니다.
엔딩에서 모든 것이 눈 아래 묻히는 차가운 겨울을 지나 푸른 새싹이 자라는 땅으로 향하는 장면은, 그리스 신화 속 데메테르의 슬픔을 떠올리게 합니다. 데메테르(Demeter)란 대지와 곡식의 여신으로, 딸 페르세포네를 잃은 슬픔이 겨울이 되고 그 재회가 봄이 된다는 신화의 주인공입니다. 욕망이 지배하는 세계가 겨울이라면, 사랑이 회복되는 순간이 봄인 것입니다. 감독이 이 계절 이미지를 엔딩에 배치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시저의 희생이 감동적인 이유는 단순히 죽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는 증오에서 벗어나, 자신을 먼저 내려놓는 선택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가 말하는 희생의 본질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 복수심(욕망)은 자신뿐 아니라 주변의 미래까지 파괴한다는 것을 시저는 직접 경험으로 깨닫습니다.
- 그 욕망을 내려놓는 계기는 외부의 강요가 아니라, 내면에서 피어난 자기 인식에서 비롯됩니다.
- 희생은 상실이 아니라 사랑의 완성이며, 그 사랑은 살아남은 자들의 기억 속에서 미래가 됩니다.
아쉬움과 리부트 4편을 기다리며
이 영화를 분석하면서 솔직히 한 가지 아쉬움이 계속 걸렸습니다. 노바라는 캐릭터가 전반부와 중반부에서는 굉장히 섬세하게 의미를 쌓아가는데, 엔딩으로 갈수록 그 역할이 옅어진다는 점입니다. 대령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노바를 직접 처단하려 하고, 시저가 자신의 희생으로 그 아이를 구해낸다는 구도로 이야기가 마무리됐더라면 주제의 정서적 무게가 훨씬 선명하게 전달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러려면 대령을 끝까지 살려두고 최후의 대결까지 끌고 갔어야 하는데, 실제 영화에서 대령은 감염 이후 스스로 총을 겨눕니다. 개인적으로는 그 선택이 조금 아쉬웠습니다.
미장센(Mise-en-scène)의 완성도는 흠잡을 데가 없습니다. 미장센이란 화면 안에 배치된 모든 시각 요소, 즉 조명, 구도, 배경, 배우의 위치를 통해 감독이 의도를 표현하는 영화 연출의 핵심 개념을 뜻합니다. 설원 위의 유인원들, 음영이 깊게 패인 군사 요새, 눈송이가 털 위에 내려앉는 질감까지, 이 영화의 화면은 한 프레임 한 프레임이 정교하게 설계되어 있습니다. WETA 디지털의 퍼포먼스 캡처(Performance Capture) 기술 덕분인데, 퍼포먼스 캡처란 배우의 실제 움직임과 표정을 디지털 캐릭터에 그대로 이식하는 기술을 말합니다. 앤디 서키스의 눈빛이 스크린에서 살아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영화 산업에서 리부트 시리즈가 3편을 넘어가면 서사의 밀도가 떨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오히려 3편에서 가장 단단해졌습니다. 혹성탈출 시리즈가 9번째 작품이며, 2016년 리부트 4편 제작 발표가 나왔다는 것을 생각하면(출처: IMDb - War for the Planet of the Apes), 이 시리즈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기대와 우려가 동시에 생깁니다. 감독이 바뀌는 만큼 서사의 철학적 무게가 유지될 수 있을지, SF 장르에서 인간성의 문제를 얼마나 깊이 다룰 수 있는지가 관건일 것입니다. 장르 영화의 철학적 가능성에 관한 연구는 로저 에버트 재단의 리뷰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이 작품에 대해 "SF가 아니라 비극시(Tragic Poetry)에 가깝다"고 평가했습니다. 저도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혹성탈출 종의전쟁 강력 추천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