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 애플렉을 배우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감독으로서의 그를 제대로 본 건 이 영화가 처음이었는데, 첫 장면부터 완전히 예상이 빗나갔습니다. 2010년작 <타운>은 보스턴 찰스타운을 배경으로 한 범죄 스릴러로, 화려한 특수효과 없이도 이렇게 숨막히는 긴장감이 가능하다는 걸 제게 다시 일깨워준 영화입니다.
찰스타운이라는 공간이 만들어내는 무게감
일반적으로 범죄 영화는 허구의 공간을 배경으로 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타운>은 실제 보스턴의 찰스타운(Charlestown)을 그대로 무대로 씁니다. 찰스타운은 한때 미국에서 은행 강도를 가장 많이 배출한 동네로 알려진 곳입니다. 영화는 이 지역성을 서사의 뼈대로 삼아, 단순한 범죄극이 아닌 계층과 환경이 개인의 운명을 어떻게 옭아매는지를 정면으로 다룹니다.
미장센(mise-en-scène)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이는 화면 안에 배치되는 모든 시각적 요소, 즉 조명·배경·인물의 위치까지 연출하는 종합적인 시각 언어를 뜻합니다. 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먼저 감탄한 것도 바로 이 미장센이었습니다. 촬영감독 로버트 엘스윗이 포착한 보스턴의 풍경은 차갑고 건조한 회색빛인데, 이 톤이 인물들의 감정 상태와 너무나 자연스럽게 맞물려 돌아갑니다. 개봉 초부터 벤 애플렉에게 '포스트 클린트 이스트우드'라는 수식어가 붙은 건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더그(벤 애플렉 분)가 인질이었던 클레어(레베카 홀 분)에게 접근하면서 느끼는 감정의 결은, 단순한 로맨스가 아닙니다. 그건 이 동네를, 이 삶을 벗어나고 싶다는 간절함의 다른 이름입니다. 컴퓨터 교실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상을 보내는 저로서는, 태어난 환경이 선택지를 얼마나 좁혀놓는지에 대한 이 영화의 질문이 특히 묵직하게 다가왔습니다.
하이스트무비의 문법을 따르되,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간 서사
하이스트 무비(Heist Movie)란 범행 계획·실행·도주의 3단계 구조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범죄 장르를 말합니다. <오션스 일레븐>처럼 세련된 작전 수행의 쾌감을 주는 방식이 대표적입니다. 그런데 <타운>은 이 공식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면서 실제로는 그 안에 훨씬 무거운 이야기를 끼워 넣습니다.
이 작품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받는 마이클 만 감독의 <히트>(1995)를 생각해보면 이해가 쉽습니다. <히트>는 범죄자와 형사가 팽팽하게 맞서는 구도 속에 인간적 고독과 직업적 신념을 함께 담아냈는데, <타운> 역시 그 정신적 계보를 잇습니다. 실제로 두 영화 모두 도심 총격전 시퀀스가 리얼리즘(realism)의 미학으로 높이 평가받습니다. 리얼리즘이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려는 예술적 태도로, 이 영화에서는 CG 대신 실제 총기 동작과 현장 사운드를 통해 구현됩니다.
제가 직접 두 영화를 이어서 본 적이 있는데,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히트>의 유명한 도심 총격전과 <타운>의 보스턴 골목 추격 시퀀스를 비교하면, 스타일은 다르지만 긴장감의 밀도는 오히려 <타운>이 더 촘촘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협소한 공간과 실제 보스턴 지형이 주는 현장감이 그 차이를 만들어낸 것 같습니다.
<타운>이 하이스트 무비로서 특히 잘 만들어진 이유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도심 총격전과 카체이싱 시퀀스를 CG 없이 실사로 구현하여 타격감과 현장감을 극대화했습니다.
- 후반부 무대인 MLB 보스턴 레드삭스의 홈구장 펜웨이 파크(Fenway Park)를 실제 로케이션으로 활용해 장소적 리얼리티를 확보했습니다.
- 각본이 장르적 쾌감과 인물의 내면 서사를 동시에 끌고 가며 어느 한쪽을 희생시키지 않습니다.
- 해리 그레그슨 윌리엄스의 음악이 긴장 장면과 감정 장면 모두에서 과잉 없이 정확하게 기능합니다.
제레미 레너의 연기와 앙상블이 만든 긴장의 축
영화에서 더그의 오랜 동료 젬을 연기한 제레미 레너는 이 작품으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Academy Award for Best Supporting Actor) 후보에 올랐습니다.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이란 주연을 돕는 조연 배우 중 가장 뛰어난 연기를 보여준 인물에게 수여되는 상으로, 할리우드에서 배우로서의 입지를 가늠하는 중요한 지표 중 하나입니다.
제 경험상 이 영화에서 레너의 연기는 좀 다릅니다. 단순히 폭발적이고 위험한 캐릭터가 아니라, 동네를 떠나려는 친구에 대한 배신감과 그 배신감을 절대 인정하지 못하는 자존심이 뒤엉킨 복잡한 인물입니다. 그 감정의 층위가 스크린을 통해 고스란히 전달되는 장면들이 있는데, 그때마다 저도 모르게 등받이에서 등이 떨어졌습니다.
존 햄이 연기하는 FBI 요원과의 심문 장면도 인상적입니다. 두 배우가 주고받는 대사의 밀도는 어떤 액션 시퀀스보다 숨막혔습니다. 일반적으로 FBI 수사물은 주인공보다 형사 쪽이 도덕적으로 우월하게 그려진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 영화는 그 경계도 슬쩍 흔들어놓습니다. 수사관 역시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모습이 나오는데, 이 부분이 영화의 도덕적 그레이존(gray zone)을 더 두껍게 만들어줍니다.
여담이지만, 도주 장면에서 마주친 경찰관이 잠시 고민하다 결국 모른 척 하는 짧은 클립이 유튜브에서 꽤 화제가 됐습니다. '영화 역사상 가장 현실적인 결정의 순간'이라는 제목으로 돌아다니는 그 장면인데, 저도 처음 봤을 때 웃음이 났다가 이내 씁쓸해졌습니다. 저는 그게 단순한 유머 클립이 아니라, 이 영화가 현실을 얼마나 정밀하게 포착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단면이라고 생각합니다.
펜웨이 파크 총격전, 그리고 박평식 3점의 의미
후반부 클라이맥스는 실제 MLB 구장인 펜웨이 파크에서 펼쳐집니다. 펜웨이 파크는 1912년에 개장한 보스턴 레드삭스의 홈구장으로, 미국에서 현재 사용 중인 야구장 중 가장 오래된 곳입니다. 이 공간을 배경으로 총격전을 배치한 것은 단순한 선택이 아닙니다. 보스턴이라는 도시 정체성의 상징 앞에서 모든 것이 끝나는 구조는, 이 영화의 지역성 서사와 완벽하게 맞아떨어집니다.
개인적으로 이 시퀀스를 처음 봤을 때, 총소리보다 적막이 더 오래 귓가에 남았습니다. 그 공허함이 더그의 결말과 맞닿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미국 영화 전문 매체 로저 이버트닷컴의 리뷰에서도 이 영화의 결말 처리를 두고 "장르의 관습을 따르면서도 감정적으로 정직하다"고 평한 바 있습니다 (출처: RogerEbert.com).
국내에서는 개봉 당시 한 평론가가 10점 만점에 3점을 주며 평론가 평균 점수를 크게 끌어내린 일화가 있었습니다. 다른 평론가들이 대부분 호평한 상황이었기에 당시 관객 반응은 상당히 거셌습니다. 그런데 그 평론가의 필모그래피를 살펴보면, 마이클 만 감독의 <콜래트럴>이나 <히트> 같은 작품에도 일관되게 박한 점수를 줬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타운>이 마이클 만 스타일에 대한 오마주(hommage)가 짙은 작품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 평가는 적어도 내적으로 일관성이 있습니다. 오마주란 선배 작가나 작품에 대한 존경을 영화적 방식으로 표현하는 기법을 말합니다. 저는 그 3점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만, 적어도 이해할 수는 있었습니다.
마이클 만의 영화 문법이 어떻게 21세기 하드보일드 스릴러에 흡수됐는지에 대한 보다 학문적인 맥락은 미국영화연구소(AFI) 아카이브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타운>은 지금 봐도 전혀 낡지 않았습니다. 거실 조명을 낮추고 화면에 집중하는 순간, 2010년 보스턴의 차가운 공기가 느껴지는 영화입니다. 태어난 환경이 곧 운명이 되어버리는 이야기는 시대를 가리지 않으니까요. 아직 보지 않으셨다면 마이클 만의 <히트>와 함께 연달아 보시길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