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얼샤 로넌이 열여섯 살 소녀 살인병기를 연기한 영화 <한나>(Hanna, 2011)는 개봉 당시 여성 액션 영화의 문법을 통째로 뒤집었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저도 처음 봤을 때 "이게 과연 장르 액션 영화인가, 잔혹동화인가" 헷갈릴 만큼 독특한 인상을 받았는데요. 그 감각이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 있어서 이렇게 글로 풀어봅니다.
줄거리: 설원에서 사막까지, 한 소녀의 탈출
핀란드 북극권의 눈 덮인 오지, 아버지 에릭(에릭 바나 분)으로부터 사냥·무술·사격 등 혹독한 훈련을 받으며 자란 소녀 한나(시얼샤 로넌 분). 외부 세계는 오직 백과사전과 이론으로만 배웠습니다. 고래의 심장 무게가 590킬로그램이라는 사실은 줄줄 외우면서, 정작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는 온몸이 굳어버리는 그런 아이였지요. 이 대비가 영화 초반부의 가장 큰 매력이기도 합니다.
에릭이 심어준 복수의 목표는 CIA 선임 요원 마리사 비글러(케이트 블란쳇 분)였습니다. 마리사는 과거 도주 중이던 한나의 어머니 요한나를 총격으로 살해한 인물입니다. 한나가 스스로 신호를 보내 CIA에 위치를 노출시키면서 영화의 추격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체포된 한나는 지하 기지 독방에 갇히지만, 마리사를 닮은 요원을 연기로 속여 순식간에 제압하고 탈출합니다. 이 지하 기지 시퀀스는 제가 이 영화를 처음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 장면이기도 합니다.
탈출 후 도달한 곳은 모로코의 사막이었습니다. 설원에서 사막으로 배경이 바뀌는 이 전환이 단순한 지리적 이동이 아니라, 한나가 비인간적 존재에서 인간적 존재로 거듭나는 서사적 분기점이기도 합니다. 캠핑 중인 또래 소녀 소피와 그 가족을 만나 처음으로 일상을 경험하는 장면들, 특히 스페인 남자애를 만나 "키스할 때는 34개의 안면근육이 움직인다"고 설명하는 장면은 웃음과 안쓰러움이 동시에 밀려왔습니다.
액션: 케미컬 브라더스 비트와 함께 완성된 영화적 문법
이 영화의 액션을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미장센(mise-en-scène)입니다. 미장센이란 카메라에 포착되는 모든 시각적 요소, 즉 조명·세트·배우의 위치·움직임 등을 총괄하는 영화 연출 개념입니다. 조 라이트 감독은 이 개념을 극한까지 밀어붙였습니다. 핀란드의 백색 설원, 모로코의 주황빛 사막, 베를린의 냉랭한 도시 풍경을 각기 다른 색조로 대비시켜 한나의 감정선이 어디쯤 와 있는지 색으로 먼저 알려줍니다.
여기에 케미컬 브라더스(The Chemical Brothers)의 스코어(score), 즉 영화를 위해 제작된 오리지널 음악이 더해지면 효과가 배가 됩니다. 스코어란 영화의 특정 장면과 감정에 맞게 작곡된 배경음악을 의미합니다. 단순히 분위기를 깔아주는 수준이 아니라, 편집의 컷 타이밍과 배우의 동작이 비트에 정확히 맞물립니다. 지하 기지 탈출 장면에서 심박수처럼 올라가는 전자음을 들었을 때,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액션 영화에서 음악이 이렇게까지 연출의 일부가 될 수 있다는 걸 새삼 느꼈습니다.
조 라이트 감독이 <한나> 이전에 연출한 작품들, 예를 들어 <어톤먼트(Atonement, 2007)>나 <프라이드 앤 프레쥬디스(Pride and Prejudice, 2005)>가 문학적 텍스트를 시각화하는 데 특화된 감독임을 떠올리면 이 영화의 연출 방향이 더 잘 이해됩니다. 그가 <한나>에서도 그림 형제의 잔혹동화 구조를 액션 장르 위에 겹쳐놓은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한나를 빨간 모자, 마리사를 마녀 또는 늑대로 읽는 시각도 있는데, 저는 그 독법이 꽤 설득력 있다고 봅니다. 베를린의 버려진 놀이공원, 그중에서도 늑대의 입 모양을 본뜬 건축물 앞에서 펼쳐지는 마지막 대결 장면은 그 상징을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순간입니다.
영화 액션의 완성도를 평가할 때 제가 개인적으로 보는 기준이 있는데, 바로 촬영 기법 중 롱테이크(long take) 활용도입니다. 롱테이크란 편집 없이 하나의 카메라 샷을 길게 이어가는 기법으로, 배우와 스태프 모두의 실력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한나>의 지하 기지 탈출 및 베를린 지하철 격투 장면은 이 기법을 적절히 섞어가며 관객이 호흡을 고를 틈을 주지 않습니다. 영화 액션의 기술적 완성도에 관심 있는 분이라면 이 부분만 따로 다시 볼 만한 가치가 충분합니다.
시얼샤 로넌: 이 역할은 그녀가 아니면 불가능했습니다
시얼샤 로넌(Saoirse Ronan)이라는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건 <러블리 본즈(The Lovely Bones, 2009)>를 통해서였는데, <한나>에서 그 잠재력이 완전히 폭발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캐릭터 조형(character building), 즉 배우가 역할의 내면과 외면을 일관성 있게 구성하는 작업 측면에서 보면 시얼샤 로넌의 한나는 거의 교과서 수준입니다.
감정이 소거된 냉혹함과, 처음 보는 세계 앞에서 굳어버리는 순수한 당혹감. 이 두 극단을 한 얼굴 안에서 오가는 연기는 대사가 거의 없는 장면에서도 충분히 전달됩니다. 특히 모로코에서 처음으로 음악을 듣고 멈춰 서는 장면, 그리고 소피 가족에게 "엄마는 총알 세 개를 맞았어요"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장면은 제가 직접 여러 번 돌려봤을 만큼 인상적이었습니다.
상대역인 케이트 블란쳇의 마리사도 빠질 수 없습니다. 마리사의 결벽적인 동작 하나하나, 심지어 이를 닦는 방식까지 캐릭터의 통제욕을 표현하도록 설계됐습니다. 한나가 감정을 찾아가는 소녀라면, 마리사는 감정을 철저히 억압한 어른의 끝을 보여줍니다. 이 대비 구조, 즉 내러티브 대칭(narrative symmetry)이 영화를 단순한 추격전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핵심 장치입니다. 내러티브 대칭이란 두 캐릭터의 성격이나 운명이 거울처럼 맞물려 서사에 깊이를 더하는 기법입니다.
시얼샤 로넌은 이후 <레이디 버드(Lady Bird, 2018)>, <작은 아씨들(Little Women, 2019)> 등으로 아카데미 노미네이션을 여러 차례 받으며 세대를 대표하는 배우로 자리 잡았습니다. 아일랜드 출신 배우로서의 독특한 발음과 눈빛은 그녀만이 가진 트레이드마크이기도 합니다. <한나>가 없었다면 그 이후의 커리어도 조금은 달랐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쉬운 점: 서사의 빈 구멍이 너무 크다
이쯤에서 솔직한 이야기를 꺼낼 필요가 있습니다. 영화 <한나>가 스타일과 연기에서는 뛰어나지만, 서사 구조(narrative structure) 면에서는 분명히 약점이 있습니다. 서사 구조란 이야기가 관객에게 원인과 결과, 동기와 목적을 얼마나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가를 가리킵니다.
영화가 끝나도 답을 주지 않는 질문들이 너무 많습니다. 제가 실제로 이 영화를 보고 나서 한참 찜찜했던 부분들을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 CIA는 왜 한나를 제거하는 데 그토록 집착하는가? 한나가 살아 있으면 어떤 위협이 되는지 충분히 설명되지 않습니다.
- 살인병기 프로젝트의 목적이 무엇인가? 유전자 조작으로 태어난 실험체라는 사실은 공개되지만, 그 프로젝트가 애초에 왜 시작됐는지는 끝까지 모호합니다.
- 양부 에릭이 한나를 데리고 도주하며 복수를 준비한 진짜 동기는 무엇인가? 단순한 부성애인지, 다른 의도가 있었는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이런 빈 구멍들이 아쉽기는 하지만, 동시에 이것이 이 영화를 드라마 시리즈로 확장하게 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에서 제작된 드라마 <한나> 시리즈는 영화가 남긴 공백을 채우며 비교적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드라마 형식이 가진 호흡의 여유가 이 소재에는 더 잘 맞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드라마의 캐스팅과 방향성에 대해서는 IMDb 한나 시리즈 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비슷한 설정의 영화들과 비교해봐도 이 아쉬움은 더 선명해집니다. 조금 아쉽지만
재미 있었던 영화 한나 추천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