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랜도 블룸 나오는 액션 블록버스터 정도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멍하니 화면만 바라보고 있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2005년작 킹덤 오브 헤븐(Kingdom of Heaven)은 전쟁 영화를 빌려 종교와 신념, 그리고 인간의 양심을 묻는 작품입니다.
Kingdom of Heaven, 제목부터 묻고 들어갑니다
킹덤 오브 헤븐(Kingdom of Heaven)이라는 제목을 처음 접했을 때, 저도 그냥 '천국 어딘가의 이야기구나' 하고 넘겼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기독교 신학에서 꽤 묵직한 개념을 품고 있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신국(神國, Kingdom of God)이란 개념은 단순히 사후 세계나 장소적 천국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신학적으로는 하나님의 통치와 질서가 실현되는 상태, 즉 '제도적·영적 통치 체계'를 의미합니다. 리들리 스콧이 이 제목을 선택한 건 꽤 의도적이었다고 봅니다. 영화 내내 등장인물들이 신의 이름을 빌려 칼을 들지만, 정작 신이 원하는 통치가 무엇인지는 아무도 확신하지 못하니까요.
리들리 스콧 감독은 이미 2000년 글래디에이터(Gladiator)로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바 있고, 이후 아메리칸 갱스터, 마션 등을 통해 시대와 장르를 가리지 않는 연출력을 보여준 감독입니다. 특히 그가 선택하는 역사적 배경들, 로마 시대, 12세기 예루살렘, 중세 영국 등은 단순한 볼거리용 무대가 아닙니다. 인간의 본성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낼 수 있는 극한의 무대로서 역사를 사용한다는 느낌을 매번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영화를 제대로 보고 싶다면, 극장판이 아닌 디렉터스 컷(Director's Cut)을 보셔야 합니다. 디렉터스 컷이란 감독이 극장 개봉을 위해 편집에서 잘려나간 장면들을 복원한 버전으로, 킹덤 오브 헤븐 디렉터스 컷은 약 50분 분량이 추가되어 있습니다. 극장판에서 다소 평면적으로 느껴졌던 발리앙의 내면 변화와 인물 간의 관계가 훨씬 입체적으로 살아납니다. 저는 극장판을 먼저 보고 실망했다가, 디렉터스 컷을 보고 완전히 다른 영화를 본 기분이었습니다.
살라딘과 발리앙, 그 대화 한 줄이 영화 전체였습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오래 머릿속에 남은 장면은 스펙터클한 공성전이 아니었습니다. 성벽을 사이에 두고 발리앙과 살라딘이 나누는 짧은 대화였습니다.
"예루살렘의 가치는 무엇이냐?" "아무것도 아니다... 동시에 모든 것이기도 하지."
이슬람의 군주 살라딘(가산 마수드 분)이 던진 이 대사는, 성지(聖地, Holy Land)라는 개념이 얼마나 주관적이고 위험한 것인지를 단 두 문장으로 압축해버립니다. 성지란 종교적·역사적으로 신성하다고 여겨지는 땅을 뜻하는데, 문제는 그 신성함이 언제나 '나의 신'에 의해서만 정의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나의 신'은 언제나 상대방을 죽이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알라후 아크바르(Allahu Akbar)"라는 외침도 같은 맥락으로 읽힙니다. 원래 뜻은 '신은 위대하다'이지만, 영화 속에서는 전투의 함성으로 쓰입니다. 신의 이름으로 외치는 말이 어떻게 쓰이느냐에 따라 기도가 되기도 하고 전쟁 구호가 되기도 한다는 것, 이게 이 영화가 끊임없이 들이미는 불편한 질문입니다.
실제로 십자군 전쟁(Crusades)의 역사적 맥락을 보면 이 불편함은 더욱 커집니다. 십자군 전쟁이란 11세기부터 13세기에 걸쳐 기독교 세계가 성지 탈환을 명분으로 이슬람 세력과 벌인 일련의 종교 전쟁을 말합니다. 역사학자들은 이 전쟁이 순수한 종교적 이유보다는 정치적 이해관계와 경제적 욕망이 얽혀 있었다고 평가합니다. 이에 관해서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십자군 전쟁 항목에서도 자세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발리앙(올랜도 블룸 분)이 끝내 예루살렘 성문을 열고 백성들의 안전한 퇴로를 협상으로 얻어내는 결말은, 제가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달랐습니다. 전쟁 영화에서 영웅이 결국 칼을 내려놓고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는 장면이라니요. 그래서 더 오래 기억에 남았습니다.
킹덤 오브 헤븐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장면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발리앙과 살라딘의 협상 장면: "예루살렘의 가치"를 묻는 대화로, 영화 전체 주제가 압축된 핵심 시퀀스입니다.
- 보두앵 4세의 가면 장면: 나병(Hansen's disease)을 앓으면서도 평화를 유지하려는 왕의 모습에서 진정한 지도자의 딜레마가 드러납니다. 에드워드 노튼이 얼굴을 한 번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가장 강렬한 존재감을 보여줍니다.
- 성벽 붕괴 공성전: 중세 공성전(siege warfare)의 전술을 시각적으로 충실히 재현한 장면으로, 투석기와 공성탑의 운용 방식이 역사적 고증에 충실합니다.
- 발리앙이 성민 전체를 기사로 임명하는 장면: 신분제 사회에서 이 행위가 얼마나 급진적인 것이었는지를 생각하면, 단순한 격려 장면이 아닙니다.
디렉터스 컷이 명작을 만든다는 증거
영화 평론에서 디렉터스 컷(Director's Cut)을 원본과 별개의 작품으로 취급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킹덤 오브 헤븐은 그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2005년 극장 개봉 당시에는 혹평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디렉터스 컷이 공개된 이후 평가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제가 극장판을 처음 봤을 때, 발리앙이 왜 갑자기 영주 역할을 수행하는지, 인물 간의 감정선이 어떻게 형성된 건지 몇 가지 흐름이 끊기는 느낌이었습니다. 약 50분 분량이 추가된 디렉터스 컷을 보고서야 그 공백들이 채워졌습니다. 보두앵 4세와 발리앙의 관계, 예루살렘 내부의 정치 역학, 그리고 주인공의 신앙과 회의(懷疑) 사이의 갈등이 훨씬 두텁게 그려집니다.
영화 음악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해리 그레그슨 윌리엄스(Harry Gregson-Williams)가 작곡한 오리지널 스코어(Original Score)는, 쉽게 말해 영화를 위해 새롭게 작곡된 배경 음악 전체를 가리킵니다. 사막의 황량함과 중세 성당의 웅장함을 동시에 담아낸 이 음악은, 영상이 없어도 장면이 떠오를 만큼 인상적이었습니다. 특히 협상 장면과 엔딩에서 흐르는 코러스는 이 영화의 주제를 음악으로 다시 한 번 말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촬영감독 존 매티슨(John Mathieson)의 미장센(mise-en-scène)도 주목할 만합니다. 미장센이란 화면 안에 배치되는 모든 시각적 요소, 배우의 위치, 조명, 색감, 구도 등을 총체적으로 설계하는 것을 뜻합니다. 프랑스의 차가운 설경과 모로코의 작열하는 사막을 교차 배치하면서, 주인공의 내면 변화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방식은 전형적인 설명 대신 이미지로 말하는 영화의 힘을 잘 보여줍니다. 이러한 촬영 기법은 영화제작 측면에서도 여러 차례 분석된 바 있으며, IMDB의 킹덤 오브 헤븐 정보 페이지에서도 기술적인 배경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영화를 어떤 버전으로 볼지에 대해서는, 저는 주저 없이 디렉터스 컷을 권합니다. 약 3시간 14분이라는 러닝타임이 부담스러울 수 있지만, 그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결국 킹덤 오브 헤븐은 전쟁 영화의 외피를 입고 있지만, 실제로는 신념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신념이 폭력을 정당화할 수 있는지를 묻는 영화입니다. 화려한 공성전보다 조용한 대화 한 줄이 더 오래 남는다는 것이 이 영화의 진짜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디렉터스 컷을 보지 않으셨다면, 긴 주말 저녁에 한번 도전해 보시기를 권합니다. 극장판과는 분명히 다른 영화를 보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