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시간 35분짜리 영화를 극장에서 본다고 하면 주변에서 열이면 열 말립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막상 다녀오고 나니, 중간 인터미션(intermission) 덕분에 생각보다 훨씬 수월했고, 오히려 "더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이상한 경험을 했습니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완전판 복수극 <킬 빌: 더 홀 블러디 어페어>를 직접 보고 느낀 것들을 솔직하게 적어봤습니다.
4시간 35분을 어떻게 버티냐고요? 저도 그게 제일 걱정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장시간 상영 영화는 중간에 집중력이 흐트러진다고들 합니다. 저도 그 걱정 때문에 한동안 예매를 미뤘습니다. <킬 빌: 더 홀 블러디 어페어>는 원래 1부와 2부로 나뉘어 개봉한 작품인데, 감독이 처음부터 한 편으로 구상했던 버전을 이번에 드디어 극장에서 볼 수 있게 된 겁니다. 타란티노 본인이 오랫동안 원했던 형태라고 하니, 이건 단순한 재상영이 아니라 진짜 완성본을 처음 보는 경험이라고 봐야 합니다.
막상 들어가 보니 인터미션(intermission), 즉 중간 휴식 시간이 있었습니다. 인터미션이란 장시간 공연이나 상영에서 관객이 잠깐 쉬어갈 수 있도록 마련된 중간 휴식 구간을 뜻합니다. 덕분에 화장실도 다녀오고, 음료도 보충하고, 1부의 여운을 정리하면서 2부를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한 가지 주의할 점은, 2부 시작 전에 광고 없이 바로 본편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인터미션 끝나자마자 자리 잡지 않으면 첫 장면을 놓칩니다. 제가 경험해보니 이게 생각보다 촉박하게 느껴졌습니다.
엔딩 크레딧 이후에는 <유키의 복수>라는 단편 애니메이션이 쿠키 영상으로 붙어 있습니다. 원래 감독이 구상했지만 사정상 추가하지 못했던 내용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크레딧이 꽤 길기 때문에 시간이 빠듯하신 분들은 유튜브에 공개된 버전을 따로 보셔도 무방합니다. 저는 그냥 끝까지 자리를 지켰는데, 분위기 전환이 되는 짧은 완결편 같은 느낌이라 나쁘지 않았습니다.
B급인 척하는 S급, 타란티노식 미장센의 정체
미장센(mise-en-scène)이란 화면 안에 배치된 모든 시각적 요소, 즉 배우의 위치, 조명, 색채, 소품, 배경까지 감독이 의도적으로 설계한 시각적 구성 전체를 가리키는 영화 용어입니다. <킬 빌>에서 이 미장센이 특히 돋보이는 장면이 바로 오렌 이시이(루시 리우)와의 설원 결투 시퀀스입니다. 흰 눈이 쌓인 일본식 정원에서 피가 흩뿌려지는 장면은, 색채 대비만으로도 영화적 긴장감을 극대화하는 연출입니다. 20년이 지난 지금 봐도 그 장면만큼은 전혀 낡지 않았습니다.
타란티노 감독이 <킬 빌>에 쏟아부은 장르 오마주(homage)도 압도적입니다. 오마주란 선배 작품이나 감독에게 경의를 표하는 방식으로, 그 스타일이나 장면을 의도적으로 인용하는 기법을 말합니다. 이소룡의 <사망유희>를 연상시키는 노란 트레이닝수트, 서부극 특유의 주줌(zoom in) 기법, 홍콩 무협 영화의 과장된 효과음까지 한 화면 안에 뒤섞어 놓았는데, 제 경험상 이걸 처음 봤을 때는 그냥 "요란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런데 여러 장르를 알고 나서 다시 보니 각각의 인용이 얼마나 정밀하게 계산된 것인지 새삼 놀랐습니다.
오렌 이시이의 과거를 담은 2D 애니메이션 파트는 이번 감독판에서 추가 분량이 포함됐다고 합니다. 이 파트를 만든 곳은 일본의 프로덕션 I.G(Production I.G)로, <공각기동대>와 <진격의 거인> 등으로 유명한 스튜디오입니다(출처: Production I.G 공식 사이트). 실사로 표현했다면 지나치게 자극적이었을 내용을 애니메이션 특유의 과장된 미학으로 처리해, 오히려 캐릭터의 비극성이 더 강렬하게 전달됩니다. 저는 이 파트가 단순한 연출 실험이 아니라 장르의 경계를 아예 지워버리려는 의도였다고 봅니다.
킬 빌 OST, "이 음악이 여기서 나온 거였어?"
일반적으로 영화 음악은 해당 영화를 위해 새로 작곡된다고 알려져 있지만, <킬 빌>의 경우는 다릅니다. 타란티노 감독은 기존에 존재하는 곡들을 가져다 장면에 붙이는 방식을 선호하는 감독으로, 이 작품에서도 선곡 자체가 하나의 연출 언어처럼 작동합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 곡 어디서 많이 들었는데"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고, 찾아보니 국내 예능 프로그램에서 수도 없이 써온 곡들이었습니다.
대표적인 곡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Battle Without Honor Or Humanity (Tomoyasu Hotei) - 국내 예능에서 긴장감을 조성할 때 거의 단골로 쓰이는 곡으로, 원작이 <킬 빌>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분들이 많습니다.
- Bang Bang (My Baby Shot Me Down) (Nancy Sinatra) - 영화 오프닝을 장식하는 곡으로, 복수극의 서막을 알리는 데 이보다 어울리는 선곡이 있을까 싶습니다.
- Ironside (Quincy Jones) - 특정 캐릭터가 등장할 때마다 짧게 삽입되는 방식으로 쓰였는데, 원곡은 3분이 넘는 긴 곡입니다.
- The Lonely Shepherd (Gheorghe Zamfir) - 팬플루트 특유의 쓸쓸한 음색이 복수극의 감정선 전체를 한 곡으로 요약해주는 것 같습니다.
이 선곡들이 단순히 분위기 띄우기용이 아니라, 장면의 감정을 설계하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타란티노식 음악 연출은 독보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마지막 키도(우마 서먼)와 빌(데이비드 캐러딘)의 대화 장면에서는 음악이 단 한 음도 깔리지 않습니다. 그 침묵이 오히려 가장 강렬한 긴장이 됩니다. 제 경험상 이 대화 장면이 영화 전체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씬이었습니다.
20년 된 영화, 지금 봐도 괜찮을까요? 직접 검증해봤습니다
<킬 빌>이 2003년 개봉작이라는 걸 염두에 두고 보면, 지금 기준으로는 어색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분명 있습니다. 우마 서먼의 일본어 발음은 상당히 어색하고, 일부 CG나 편집은 현재 기술 수준과 비교하면 낡아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이 점은 솔직히 인정해야 합니다. "20년이 지났는데도 전혀 구식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건 과장이고, 저는 그 부분에서 제법 거슬리는 장면을 몇 개 만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부보다 2부가 더 재밌었다는 점은 의외였습니다. 1부가 화려한 액션의 향연이라면, 2부는 인물들의 감정과 대사로 끌어가는 구조입니다. 버드 역의 마이클 매드슨이 보여주는 축 처진 듯한 연기와, 빌 역의 데이비드 캐러딘이 따뜻한 미소 뒤에 숨긴 냉기는 지금 봐도 전혀 녹슬지 않은 배우들의 힘입니다. 카타르시스(catharsis)란 억눌린 감정이 예술적 경험을 통해 해소되는 심리적 상태를 뜻하는 개념인데, 2부 엔딩에서 그 감각을 정확히 경험했습니다.
영화의 장르적 특성과 관련해, 영화진흥위원회(KOFIC)에서는 장르 영화를 "특정 관습과 코드를 공유하는 영화군"으로 분류하며, 관객이 그 코드를 알수록 더 깊은 감상이 가능하다고 설명합니다. <킬 빌>이 딱 그 경우입니다. 무협, 사무라이, 스파게티 웨스턴, B급 착취 영화(exploitation film, 선정성이나 폭력성을 전면에 내세워 상업적 자극을 극대화하는 저예산 장르 영화)까지 알면 알수록 보이는 게 많아집니다. 하지만 그걸 몰라도 충분히 재밌게 볼 수 있다는 것, 그게 이 영화가 명작으로 남아 있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봐야지 하면서 아껴두셨던 분들이라면 지금이 딱 좋은 타이밍입니다. 단, 팔다리가 날아다니고 피가 분수처럼 쏟아지는 장면이 꽤 많기 때문에 폭력적인 영상에 민감하신 분들께는 솔직히 비추천합니다. 그런 부분만 감당이 된다면, 20년이 지난 지금 극장에서 봐도 여전히 값어치를 하는 영화라고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