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를 배경으로 한 영화가 결국 '집으로 돌아오는 이야기'라면, 굳이 45억 km를 날아가야 했을까요. 처음 예고편을 봤을 때 저도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보고 나서는 달랐습니다. 제임스 그레이 감독의 2019년작 <애드 아스트라>는 SF 액션을 기대한 분들께는 당혹스러운 영화지만, 그 거리와 침묵이 없었다면 결코 완성될 수 없었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SF인가, 스페이스 오페라인가 — 장르의 경계에서
<애드 아스트라>를 이야기하기 전에, SF라는 장르 자체를 한번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SF(Science Fiction), 즉 과학 소설이란 현실적 과학 지식을 기반으로 상상력을 더한 장르입니다. 과거에는 이 '과학적 근거'의 밀도가 장르 분류의 핵심 기준이었습니다. H.G. 웰스의 1898년작 <우주전쟁>이 세계 최초로 열광선(레이저) 개념을 제시했고, 이것이 실제 군사 기술 연구로 이어진 사례가 대표적입니다.
반면 <스타워즈>가 SF가 아닌 스페이스 오페라(Space Opera)로 분류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분들도 많습니다. 스페이스 오페라란 우주를 배경으로 하되 과학적 개연성보다 서사와 모험, 감정의 스펙터클에 집중하는 하위 장르입니다. 쉽게 말해 우주라는 무대를 빌렸을 뿐, 과학적 엄밀함은 부차적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애드 아스트라>는 어디에 속할까요. 이 영화를 SF로 볼 것인지, 아니면 심리 드라마로 볼 것인지를 두고 의견이 갈립니다. 과학적 고증 오류가 몇 가지 존재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영화가 '현실적 질감을 가진 과학적 소재를 기반으로 인간의 정서와 주제를 표현하는' 현대 SF의 흐름 안에 충분히 놓인다고 봅니다. <컨택트(Arrival)>나 <그녀(Her)>처럼, SF적 설정이 장르의 목적이 아니라 인간을 들여다보는 도구로 기능하는 방식 말입니다.
부성 신화(父性神話)라는 이름의 저주
영화의 핵심 갈등은 로이 맥브라이드(브래드 피트 분)와 그의 아버지 클리포드(토미 리 존스 분)의 관계입니다. 부성 신화(Paternal Myth)란 아버지를 영웅적 존재로 신격화하는 문화적 서사 구조를 뜻합니다. 로이는 평생 그 신화 안에 갇혀 살았습니다. 영웅 아버지의 아들로서 자신도 같은 길을 걸어야 한다는 압박, 그리고 그 압박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감정 자체를 차단해버린 인간이 된 것입니다.
심박수가 80을 넘어본 적이 없다는 설정이 처음엔 과장처럼 보였는데, 영화를 보면 볼수록 그게 능력이 아니라 마비의 증거라는 걸 느끼게 됩니다. 극초반 우주 안테나 폭발로 성층권에서 자유낙하하는 장면에서도 침착하게 음성 보고를 이어가는 로이의 모습은, 솔직히 말하면 영웅적이라기보다 무섭습니다. 인간이 저럴 수 있나 싶을 정도로요.
로이가 해왕성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 내내 반복되는 패턴이 있습니다. 그는 계속 혼자가 됩니다. 자의건 타의건, 사고건 선택이건. 이 고독의 반복이 단순한 서사 장치가 아니라, 그가 평생 스스로 선택해온 존재 방식의 투영이라는 점에서 제게는 꽤 날카롭게 읽혔습니다.
<애드 아스트라>가 <암흑의 핵심>이나 <지옥의 묵시록>과 자주 비교되는 이유가 바로 이 구조 때문입니다. 강을 거슬러 올라가듯 우주를 가로질러, 신화적 존재가 되어버린 아버지를 마주하러 가는 여정. 이 서사 구조를 의식하고 보면 영화의 밀도가 확연히 달라집니다.
우주임에도, 그리고 우주이기에 — 실존주의적 공허
실존주의(Existentialism)란 인간이 주어진 본질이나 의미 없이 먼저 존재하고,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철학적 입장입니다. <애드 아스트라>는 이 질문을 우주라는 공간에 던져 극단까지 밀어붙입니다. 해왕성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외계 지적 생명체(Extraterrestrial Intelligence)도, 거대한 우주적 의미도 없습니다. 오직 클리포드의 광기와 로이만 있을 뿐입니다.
우주를 배경으로 하되 내면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들을 비교해보면 이 영화의 위치가 더 선명해집니다.
- <그래비티> — 생에 대한 의지와 재탄생을 다루며, 우주는 극한의 생존 환경으로 기능합니다.
- <인터스텔라> —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사랑의 힘을 이야기하며, 우주는 감정의 스케일을 극대화하는 무대입니다.
- <애드 아스트라> — 의미를 찾아 끝까지 나아간 인간이 결국 '여기밖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이야기로, 우주는 공허 그 자체입니다.
일반적으로 이런 유형의 이야기는 작은 마을이나 단절된 공간에서도 충분히 표현 가능하다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저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지구의 사막이나 외딴 섬으로는 이 영화가 필요로 하는 공포스러울 정도의 적막을 만들어내기 어렵습니다. 45억 km라는 거리감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두고 온 것들과의 단절이 얼마나 돌이킬 수 없는 것인지를 물리적으로 체감하게 만드는 장치입니다. 그 아득함이 없었다면 귀환의 감동도 절반이었을 겁니다.
영화 연구 측면에서도 <애드 아스트라>는 주목받은 작품입니다. 미국영화연구소(AFI)는 이 작품을 2019년 10대 영화 중 하나로 선정한 바 있습니다(출처: AFI). 상업적 흥행과는 별개로, 작품의 밀도와 예술적 완성도를 인정받은 셈입니다.
멀어지고 나서야 보이는 것들 — 카타르시스의 구조
카타르시스(Catharsis)란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개념으로, 비극적 서사를 통해 관객이 감정적 정화와 해소를 경험하는 것을 뜻합니다. <애드 아스트라>의 카타르시스는 화려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담담하고 조용합니다. 그게 이 영화가 관객에 따라 극명하게 호불호가 갈리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해왕성 궤도 위에서 로이가 아버지에게 건네는 대사는 짧습니다. "여긴 우리밖에 없어요. 하지만 서로가 있잖아요." 이 한 줄을 위해 영화는 두 시간 가까이 달려왔습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예상보다 훨씬 강하게 감정이 올라왔는데, 돌이켜보면 그게 로이의 감정이라기보다 제 자신의 무언가와 겹쳐 보였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무언가에 집중한다는 명목으로 정작 중요한 것을 밀어내본 경험이 있는 분이라면, 이 장면이 다르게 읽힐 거라고 생각합니다.
맹목적 전진에 대한 경고라는 주제는 개인의 이야기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로이라는 인물은 끊임없이 앞으로 달리기만 하는 개인의 초상이기도 하고, 발전과 번영을 위해 인간성을 뒤에 남겨두는 사회의 메타포이기도 합니다. 제임스 그레이 감독이 인터뷰에서 "이 영화는 내 아버지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고 밝힌 것처럼(출처: Variety), 이 이야기는 보편적인 동시에 지독하게 개인적입니다.
호이트 반 호이테마의 촬영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미장센(Mise-en-scène)이란 화면 안에 배치되는 모든 시각적 요소, 즉 배우의 위치, 조명, 세트, 색채를 통해 감정과 주제를 전달하는 영화적 기법입니다. 이 영화에서 각 행성의 색채는 단순한 배경이 아닙니다. 달의 회색, 화성의 붉은빛, 해왕성의 시린 청색은 로이의 심리 상태와 정교하게 호응하며 이야기를 시각적으로 번역합니다. 이 부분은 소리를 끄고 봐도 충분히 전달될 정도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애드 아스트라>는 모든 분께 권하기 어려운 영화입니다. 우주 블록버스터를 기대했다가 조용한 독백과 정적에 당황하는 분들의 반응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저도 처음엔 그 틈이 버겁기도 했으니까요. 하지만 그 침묵 안에서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을 즐길 수 있는 분이라면, 이 영화는 꽤 오래 남는 작품이 됩니다. 한 번 보고 나서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옆에 있는 사람의 손이 조금 다르게 보이는 경험을 하신다면 이 영화가 제 역할을 다한 셈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