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레스가 쌓인 주중 저녁, 복잡한 인간 드라마 같은 건 솔직히 눈에 들어오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거실 조명을 끄고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두 거인의 격돌을 찾게 됩니다. 애덤 윈가드 감독의 2021년작 <고질라 VS. 콩>은 그 욕구를 정확히 채워준 영화였습니다. 몬스터버스(MonsterVerse) 4편을 이어온 레전더리 픽쳐스와 워너브라더스의 마지막 작품이기도 하죠.
몬스터버스, 7년의 빌드업이 이 한 편으로
몬스터버스(MonsterVerse)란 레전더리 픽쳐스와 워너브라더스가 2010년 도호사로부터 고질라 판권을 사들인 뒤 기획한 공유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뜻합니다. 쉽게 말해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처럼, 각기 다른 영화들이 하나의 세계관으로 연결된 프랜차이즈 구조입니다.
시작은 2014년 <고질라>였습니다. 1999년 필리핀에서 발견된 거대 화석과 포자에서 깨어난 괴수 무토(MUTO)가 원자력 발전소를 터전 삼아 재앙을 일으키고, 그 혼돈을 수습하러 고질라가 등장하는 구조였죠. 저는 당시 이 영화를 보며 "괴수 영화가 이렇게 진지해도 되나?" 싶었는데, 지금 돌아보면 그 묵직한 톤이 이후 시리즈 전체의 서사적 기반을 다지는 데 꼭 필요한 설계였습니다.
시간 순으로는 2017년 <콩: 스컬 아일랜드>가 가장 앞선 배경을 다룹니다. 베트남 전쟁이 끝나가던 1973년, 빌 랜다 박사가 해골섬으로 원정을 떠나 킹콩을 처음 마주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모나크(Monarch)라는 정부 기밀 기관이 등장하는데, 모나크란 대를 이어 타이탄이라 불리는 고대 거대 생명체를 추적하고 연구하는 조직을 뜻합니다. 이 모나크가 시리즈 전체의 연결 고리 역할을 합니다.
2019년 <고질라: 킹 오브 몬스터>에서는 외계 기원의 타이탄인 몬스터 제로, 즉 기도라가 등장합니다. 모나크 연구원 엠마가 적으로 돌아서며 기도라를 깨우고, 고질라가 우여곡절 끝에 이를 처치합니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조나 앨런이 기도라의 시체 일부를 챙기며 다음 편의 복선을 노골적으로 남겨두었고, 저는 그 장면에서 다음 편 개봉까지 내내 그 떡밥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일반적으로 이런 멀티버스 기획 영화는 편수가 쌓일수록 세계관이 지나치게 복잡해져 신규 관객을 잃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제 경험상 몬스터버스는 그 함정을 비교적 잘 피해갔습니다. 인간 드라마보다 타이탄의 원초성에 집중한 덕분에, 전편을 모르더라도 <고질라 VS. 콩> 한 편만으로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구조를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할로우 어스와 메카고질라, 이 영화가 정말 잘한 것들
이 영화의 시각적 설계 중심에는 할로우 어스(Hollow Earth)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할로우 어스란 지구 내부에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는 가상의 지구 공동 이론을 뜻하는데, 영화는 이곳을 타이탄들의 진정한 고향이자 콩이 왕좌를 되찾는 무대로 활용합니다. 진입 시퀀스에서 상하 중력이 완전히 역전되는 장면은 솔직히 예상 밖이었습니다. 컴퓨터 교실에서 아이들에게 서로 다른 시스템이 충돌할 때의 알고리즘 역학을 설명하는 저에게, 중력 방향 자체가 바뀌는 그 공간적 혼돈은 굉장히 흥미로운 시각 언어로 다가왔습니다.
홍콩 전투 시퀀스는 이 영화의 압도적인 하이라이트입니다. 애덤 윈가드 감독은 사이버펑크풍의 네온 컬러(Cyber-neon)를 전면에 배치했습니다. 네온 컬러란 형광등처럼 선명하게 발광하는 고채도 색상 연출을 뜻하는데, 고질라의 방사열선이 내뿜는 블루 아우라와 홍콩 빌딩들의 핑크·옐로우 조명이 부딪히는 장면은 화면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콜로세움처럼 느껴졌습니다. 일반적으로 어두운 밤 배경의 격투 장면은 피로감을 준다고들 하지만, 제 경험상 이 영화는 정반대였습니다. 오히려 색채 대비가 선명할수록 타격감이 배가되었습니다.
메카고질라(MechaGodzilla)란 인간이 타이탄을 통제하기 위해 직접 설계·제작한 기계 괴수를 뜻합니다. 에릭 피어슨과 맥스 보렌스타인이 완성한 각본은 이 메카고질라의 폭주를 통해 기술만능주의(Technocentrism)의 파멸을 경고합니다. 기술만능주의란 기술로 자연을 완벽히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사고방식을 뜻하는데, 저는 이 구도가 단순한 오락을 넘어 꽤 묵직한 메시지를 품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이 영화에서 제가 특히 주목한 연출 포인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항공모함 위 첫 대결: 바다와 하늘을 배경으로 한 개활지 전투로, 두 거인의 크기감을 극대화하는 카메라 워킹이 인상적입니다.
- 할로우 어스 진입 시퀀스: 중력 역전을 3D 레이아웃으로 구현해 관객에게 공간 감각 자체를 뒤흔드는 경험을 줍니다.
- 홍콩 야간 전투: 네온 조명과 방사열선의 색채 충돌로 시각적 카타르시스를 극대화한 핵심 장면입니다.
- 메카고질라 최종전: 고질라의 에너지를 콩의 도끼가 충전해 폭주 기계를 해체하는, 자연의 아날로그적 원초성이 기계를 이기는 서사적 클라이맥스입니다.
모션 캡처(Motion Capture)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모션 캡처란 배우의 실제 움직임과 표정 데이터를 디지털로 기록해 CG 캐릭터에 입히는 기술을 뜻합니다. WETA와 디지털 도메인이 합작한 콩의 표정 연기는 단순한 짐승의 분노를 넘어, 고독과 지침, 그리고 지아라는 청각 장애 소녀와 나누는 교감의 온기까지 섬세하게 담아냈습니다. 수어(手語)를 통해 야수와 소통하는 지아의 존재는 차가운 대규모 액션 속에서 이 영화가 놓치지 않으려 한 정서적 온도였습니다.
로튼 토마토(Rotten Tomatoes)에서 관객 점수 91%를 기록한 것도 이런 균형감의 반영이라고 봅니다. 비평가 점수(75%)보다 관객 반응이 훨씬 높다는 것은, 이 영화가 분석보다 체험에 더 적합하게 설계되었다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이 영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 그리고 몬스터버스의 끝
도호사가 독자적으로 <신 고질라> 이후의 시리즈를 기획하고 있는 만큼, 레전더리·워너의 몬스터버스 판권 종료는 사실상 확정적인 수순입니다. 그 의미에서 <고질라 VS. 콩>은 이 프랜차이즈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작품입니다. 피날레를 앞두고 제작진이 선택한 방향은 묵직한 결말보다는 화려한 축제에 가까웠고, 저는 그 선택이 옳았다고 생각합니다.
일반적으로 시리즈 마지막 편은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려다 오히려 무너지는 경우가 많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제 경험상 이 영화는 달랐습니다. 고질라는 바다로, 콩은 할로우 어스의 왕좌로 각자 돌아가는 결말은 어떤 억지 희생도, 감동을 강요하는 BGM도 없이 두 군주가 서로의 영역을 인정하며 공존으로 마무리됩니다. 그 담백함이 오히려 더 큰 여운을 남겼습니다.
음악 감독 정키 XL(Tom Holkenborg)의 스코어는 묵직한 일렉트로닉 오케스트라로 전투의 리듬을 밀고 당기는데, IMDB(Internet Movie Database)에서도 이 영화의 사운드 디자인은 별도로 언급될 만큼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시각적 아드레날린과 청각적 타격감이 맞물리는 순간들은, 이 영화를 극장이 아닌 가정에서 보더라도 반드시 사운드에 공을 들여야 하는 이유입니다.
전작들을 모두 보신 분이라면 더 큰 감흥을 얻을 수 있겠지만, 이 한 편만으로도 충분히 완결된 경험을 줍니다. 복잡한 서사보다 순도 높은 시각적 쾌감이 필요한 날, 이 영화를 거실 조명 완전히 낮추고 볼륨 한 칸 더 올려서 보시길 권합니다. 한 번 시작하면 113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