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개봉한 <첫 키스만 50번째>는 단기 기억상실증(anterograde amnesia)이라는 소재를 로맨틱 코미디에 처음으로 유쾌하게 녹여낸 작품입니다. 저도 처음 이 영화 제목을 들었을 때는 '기억을 잃은 사람 이야기면 분명 슬프고 무겁겠지'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보고 나서 완전히 예상이 빗나갔습니다.
로맨틱 코미디라는 장르, 이 영화가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로맨틱 코미디(Romantic Comedy), 흔히 '로코'라고 불리는 이 장르는 사실 익숙한 공식이 많습니다. 첫 만남, 오해, 갈등, 화해, 해피엔딩. 그 틀 안에서 수십 년간 비슷한 이야기가 반복되어 왔다는 점을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저 역시 로코 영화를 꽤 많이 봐온 편인데, 어느 순간부터 첫 장면만 봐도 결말이 보이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그런데 <첫 키스만 50번째>는 달랐습니다. 단기 기억상실증(anterograde amnesia)이란 새로운 기억을 형성하지 못하는 증상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 오늘 겪은 일이 내일 아침이면 완전히 사라지는 상태입니다. 이 설정이 로코의 뻔한 공식을 완전히 비틀어 버립니다. 남자가 여자의 마음을 얻어도 다음 날 아침이면 리셋(reset)됩니다. 리셋이란 모든 상태가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상대가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전제에서 시작하는 로맨스는 이전까지 본 적이 없었습니다.
영화 서사 측면에서도 이 작품이 돋보이는 이유가 있습니다. 감정 동기화(emotional synchronization)란 두 인물의 감정 흐름이 서로 맞물려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구조를 말하는데, 이 영화는 헨리가 매일 새로 고백하는 리듬과 루시가 꿈속에서 무의식적으로 그를 그리워하는 리듬이 아주 정교하게 맞물립니다. 제가 이 영화를 아이들과 함께 본 적이 있는데, 아이들이 "왜 저 아줌마는 맨날 모르는 척해요?"라고 물어볼 때 오히려 저 자신도 이 설정의 슬픔을 다시 느끼게 되더군요.
로맨틱 코미디가 가볍다는 편견이 있지만, 이 영화는 그 가벼움 안에 꽤 묵직한 질문을 숨겨 두고 있습니다.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진짜 사랑일 수 있을까요? 저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한동안 그 질문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하와이 영상미, 그냥 예쁜 배경이 아니었습니다
하와이(Hawaii)를 배경으로 한 영화라고 하면 흔히 관광지 홍보 영상 같은 느낌을 먼저 떠올리기 쉽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그 우려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의 미장센(mise-en-scène)은 달랐습니다. 미장센이란 카메라 프레임 안에 배치된 모든 시각적 요소, 즉 배경, 조명, 인물의 위치까지 포함하는 연출 개념입니다. 단순히 예쁜 풍경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인물의 감정 상태와 하와이의 색감을 유기적으로 연결하고 있었습니다.
헨리와 루시가 바닷가 벤치에 앉아 우쿨렐레에 맞춰 'Forgetful Lucy'를 함께 부르는 장면은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시퀀스입니다. 넓고 투명한 바다가 배경으로 깔리는데, 그 색감이 인물들의 표정과 맞닿아 있어서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감정 그 자체처럼 느껴졌습니다. 촬영 및 연출 팀이 하와이의 목조 주택 내부와 수족관의 이국적인 분위기를 대비시키면서 아늑함과 생동감을 동시에 잡아낸 방식이 인상 깊었습니다.
사운드트랙(soundtrack)도 영상미를 완성하는 데 큰 역할을 합니다. 사운드트랙이란 영화의 특정 장면에 맞춰 편성된 음악 전반을 가리킵니다. Beach Boys의 'Wouldn't It Be Nice'가 흐르는 순간, 화면의 채도가 한 단계 더 올라가는 느낌이랄까요. 실제로 IMDb의 <첫 키스만 50번째> 사운드트랙 페이지를 보면 하와이안 팝 계열 곡들이 장면별로 얼마나 섬세하게 배치되었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영상미가 좋은 영화를 볼 때 제가 개인적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기준이 하나 있습니다. "배경이 이야기를 돕고 있는가, 아니면 그냥 붙어 있는가?" 이 영화의 하와이는 단연 전자입니다. 루시의 세계가 매일 10월 13일로 고정된 것처럼, 하와이의 변하지 않는 청명한 하늘과 바다가 그녀의 반복되는 일상을 시각적으로 대변하는 장치처럼 읽혔습니다. 이건 제가 여러 번 다시 보면서 느낀 해석인데, 처음 볼 때는 그냥 예쁘다고만 생각했습니다.
아담 샌들러와 드류 배리모어의 케미, 왜 이게 특별한가요?
배우 케미(chemistry)란 두 배우가 함께할 때 스크린 위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감정적 전류 같은 것입니다. 이걸 연출로 만들어낼 수 있는 부분도 있지만, 결국 배우들 사이의 실제 호흡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어색함이 드러납니다. 아담 샌들러와 드류 배리모어는 이 영화에서 그 경계를 완벽하게 넘어섰습니다.
아담 샌들러는 원래 코미디에 특화된 배우라는 인식이 강합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그가 연기한 헨리는 어딘가 허술하면서도 진심이 넘치는 남자입니다. 코믹한 장면에서도 가볍지 않고, 진지한 장면에서도 과하지 않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드류 배리모어 역시 기억을 잃은 루시를 연기하면서도 지나치게 비극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매일 아침의 루시가 왜 그렇게 사랑스럽게 느껴지는지를 몸으로 보여줍니다.
두 사람의 케미가 가장 도드라지는 것은 아마 피날레 시퀀스(finale sequence)일 것입니다. 피날레 시퀀스란 영화의 감정적 클라이맥스를 마무리 짓는 마지막 장면 연속을 말합니다. 루시가 매일 아침 비디오를 보며 헨리와의 삶을 확인하고 배 밖으로 나오는 그 순간, 두 사람이 눈빛을 나누는 장면은 말 한마디 없이도 감정이 전달됩니다. 제가 이 장면을 처음 봤을 때 온몸에 소름이 돋았는데, 두 번째, 세 번째 볼 때도 같은 반응이 나왔습니다. 그게 케미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에서 두 주인공이 특별히 잘 어울리는 이유를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 아담 샌들러의 코미디 본능이 무거운 소재의 무게를 덜어주면서도 감정선을 흐트러뜨리지 않습니다.
- 드류 배리모어는 매일 처음 만나는 사람처럼 반응해야 하는 까다로운 설정을 매 장면 새롭게 소화해 냅니다.
- 두 배우의 실제 유머 감각이 비슷해서인지, 애드리브처럼 보이는 장면들이 오히려 더 자연스럽게 느껴집니다.
- 주변 인물들(루시의 아버지, 남동생, 수족관 동료 등)과의 코믹한 호흡까지 더해져 두 사람의 케미를 한층 입체적으로 만들어 줍니다.
로맨틱 코미디 장르를 연구하는 입장에서도 이 두 배우의 조합은 꽤 중요한 사례로 언급됩니다. 실제로 Rotten Tomatoes의 <첫 키스만 50번째> 관객 평점을 보면 전문가 평점보다 관객 평점이 훨씬 높게 형성되어 있는데, 이것이 배우 케미에 대한 관객의 반응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를 아직 보지 않았다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그냥 틀어보시기를 권합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다가 마지막 장면에서 눈가가 뜨거워지는 경험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제 경험상 이 영화는 더운 날 저녁, 조명을 낮추고 차가운 음료 한 잔 옆에 두고 보는 것이 가장 잘 어울립니다. 오늘 저녁에 뭘 볼지 고민 중이라면, 그 고민이 해결된 셈입니다.
--- 참고: https://blog.naver.com/gomsolvie/2212754148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