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영화라고 하면 화려한 의상과 예쁜 주인공을 보러 가는 거라고 생각하시는 분들 많으시죠? 저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막상 다 보고 나서 머릿속에 남은 건 앤 해서웨이의 얼굴이 아니라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라는 질문이었습니다. 패션 영화 탈을 쓴, 꽤 묵직한 이야기였습니다.
성공의 대가: 화려함 뒤에 숨겨진 것
솔직히 말하면, 영화 초반은 좀 뚱하게 봤습니다. 앤디가 면접 보는 장면부터 옷 못 입는다고 핀잔 듣는 장면까지, 전형적인 신데렐라 서사처럼 보였거든요. 앤 해서웨이가 나오는 장면마다 어딘가 어색하다는 느낌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처음엔 캐릭터와 배우가 매치가 잘 안 된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앤디가 점점 패션 세계에 녹아들면서 영화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귀걸이 하나, 코트 하나가 바뀔 때마다 그 사람의 태도와 눈빛도 달라지더라고요. 이걸 영화 용어로 비주얼 내러티브(Visual Narrative)라고 합니다. 비주얼 내러티브란 대사 없이 인물의 외형 변화만으로 내면의 변화를 보여주는 연출 기법입니다. 이 영화는 그 부분을 상당히 잘 씁니다.
문제는 그 변화의 방향이었습니다. 앤디가 멋있어질수록, 그녀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과 점점 멀어지고 있었거든요. 남자친구와의 저녁 약속을 어기고, 친한 친구들과의 시간을 잘라냈습니다. 직업적 성취를 위해 개인적인 관계를 희생하는 이 과정을 심리학에서는 역할 갈등(Role Conflict)이라고 부릅니다. 역할 갈등이란 한 개인이 맡은 여러 역할 사이에서 기대가 충돌할 때 발생하는 심리적 긴장 상태를 말합니다. 앤디가 딱 그 상태였습니다.
미란다는 그 갈등의 끝에 있는 인물처럼 보였습니다. 성공은 모두 가졌지만, 두 번의 이혼과 아이들의 냉담한 표정이 그녀 뒤를 따라다녔습니다. 직업적 성공과 삶의 만족도가 반드시 비례하지 않는다는 건, 연구로도 확인됩니다. 실제로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Harvard Business Review)에 실린 연구에 따르면, 일정 수준 이상의 소득은 행복감 향상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합니다. 미란다의 모습이 딱 그 지점이었습니다.
자아 상실: "너도 나와 같다"는 말이 소름 돋았던 이유
영화에서 제가 가장 좋았던 장면은 파리 장면입니다. 미란다가 차 안에서 앤디에게 조용히 말합니다. "너도 나와 같다"고. 그 말을 들은 앤디의 표정이 소름끼쳐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저도 그 순간 등이 서늘했습니다. 단순한 칭찬이 아니라 경고처럼 들렸거든요.
에밀리가 파리행 티켓을 빼앗기는 장면도 마음에 걸렸습니다. 에밀리는 그 파리 출장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앤디는 미란다의 지시를 그냥 수행했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상황이 직장에서도 자주 생깁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의 기회를 빼앗는 일. 그걸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게 됩니다.
이걸 심리학에서는 자아 정체성 혼란(Identity Confusion)이라고 합니다. 자아 정체성 혼란이란 사회적 역할이나 타인의 기대에 과도하게 맞추다가 자신의 본래 가치관과 욕구를 잃어버리는 상태입니다. 앤디는 바로 그 상태에서 미란다의 한마디에 깨어난 셈입니다.
이 영화가 단순한 성공 스토리가 아니라는 증거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앤디가 잠에서 깬 계기가 "더 좋은 기회를 찾아서"가 아니라 "이게 내가 원하던 삶이 맞나"라는 질문이었다는 점이요. 저는 그 전개가 정말 마음에 들었습니다. 왓챠피디아 코멘트를 보면 이 장면을 그냥 스쳐 지나가는 분들이 꽤 있어 보이던데,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이야말로 영화의 진짜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을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 직업적 성공을 위해 내 가치관을 양보하는 것은 어디까지 괜찮은가
- 타인이 정의한 '멋진 삶'이 정말 나에게도 멋진 삶인가
- 성공의 자리에 오른 뒤 내가 잃은 것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 세 가지 질문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습니다. 패션 영화에서 이런 질문을 받게 될 줄은 예상 못 했습니다.
앤디의 선택: SNS 시대에 이 영화가 더 유효한 이유
앤디가 분수대에 폰을 던지는 장면. 이게 영화의 하이라이트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전까지의 과정이 다소 길어서 약간 지루했던 건 사실인데, 그 장면 하나가 그 지루함을 다 덮어버렸습니다. 화려한 직함과 화려한 도시를 뒤로하고, 원래 하고 싶었던 저널리즘으로 돌아가는 선택. 그게 왜 그렇게 후련했냐면, 요즘 시대에 그 선택이 점점 더 어려워졌기 때문입니다.
2006년 영화인데, 지금 보면 오히려 더 와닿는 부분이 있습니다. SNS가 발달하면서 행복의 기준이 점점 더 획일화되고 있거든요. 좋은 회사, 높은 연봉, 해외 여행 사진, 명품 가방. 이게 행복한 삶의 공식처럼 소비됩니다. 미디어 효과 연구에서는 이를 사회 비교 이론(Social Comparison Theory)이라고 부릅니다. 사회 비교 이론이란 사람들이 타인과 자신을 지속적으로 비교하며 자신의 가치와 성공을 평가하는 심리적 경향을 설명하는 개념입니다. 미국심리학회(APA)에 따르면, SNS를 많이 사용할수록 자기 가치 평가가 불안정해지는 경향이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앤디가 미란다 밑에서 일하는 것을 주변 사람들은 부러워했습니다. 그게 '더 멋진 삶'처럼 보였으니까요. 그런데 앤디 본인에게 '더 멋진 것'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이 영화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바로 이 간극이라고 생각합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삶과, 자신이 실제로 원하는 삶이 다를 수 있다는 것.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를 영화 인턴과 비슷한 결로 읽었습니다. 그런데 인턴을 좋아하는 친구를 오랫동안 놀렸던 입장에서 솔직히 말하면, 이번에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다시 보면서 인턴도 다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그때 제대로 안 봤을 수도 있겠다 싶어서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앞부분이 길어서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앤디가 폰을 던지는 그 장면 하나 때문에, 이 영화가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대가리 꽃밭 패션 영화라고 생각했다가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습니다. 아직 안 보신 분이라면, 앞부분은 좀 참고 보시기를 권합니다. 뒤에서 돌아오는 게 있습니다.
--- 참고: https://blog.naver.com/or_ng_/2238635186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