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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설이다 (윌 스미스, 좀비, 촬영비화)


2007년 개봉한 영화 한 편이 전 세계 박스오피스에서 5억 8천만 달러를 벌어들였습니다. 저는 당시 무서운 영화를 극도로 싫어했는데, 친구들의 집요한 권유와 윌 스미스라는 이름 하나에 결국 극장 의자에 앉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후회했습니다. 무서워서가 아니라, 너무 좋아서.

좀비 영화인데, 왜 이렇게 쓸쓸할까요?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저는 좀비 장르라는 개념 자체가 낯선 상태였습니다. 귀신 영화도 피했고, 잔인한 영화는 예고편도 건너뛰던 제가 이 영화를 고른 건 순전히 윌 스미스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첫 장면부터 받은 충격이 컸습니다. 텅 빈 맨해튼 한복판을 스테이션왜건으로 질주하는 장면, 아무도 없는 거리에 잡초가 무성하고 사슴이 뛰어다니는 그 광경은 공포라기보다는 거대한 슬픔처럼 다가왔습니다.

이 영화가 단순한 좀비물과 다른 이유는 포스트 아포칼립스(Post-Apocalypse) 장르의 문법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란 문명이 붕괴된 이후의 세계를 배경으로 인간의 생존과 심리를 탐구하는 장르를 뜻합니다. 좀비가 나오더라도 핵심은 괴물이 아니라 혼자 남은 인간의 내면입니다. 주인공 로버트 네빌이 매일 같은 시각에 라디오 방송을 송신하고, 마네킹에게 말을 걸며 하루를 버티는 장면들이 그 증거입니다. 괴생명체를 피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혼자라는 사실을 견디는 이야기인 거죠.

저는 이 영화가 주는 쓸쓸함이 어디서 오는지 오래 생각해봤습니다. 결국 이 영화의 가장 무서운 장면은 어둠 속 괴생명체가 아니라, 네빌이 혼자 저녁을 먹는 장면이라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그 고독이 보는 사람의 가슴에 이상하리만큼 깊이 박혔습니다.

윌 스미스의 단독 연기, 정말 대단했을까요?

영화의 거의 전부를 혼자 이끌어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생각해본 적 있으신가요? 제작진은 인류 최후의 생존자라는 캐릭터를 무게감 있게 소화할 배우를 찾던 중, 이미 이 역할에 관심을 갖고 있던 윌 스미스를 캐스팅했습니다. 그는 이 역할을 자신의 배우 인생에서 가장 큰 도전이자 기회로 받아들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솔직히 처음엔 '윌 스미스니까 잘하겠지'라는 가벼운 기대를 품었습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그 생각은 완전히 뒤집혔습니다. 특히 대사 없이 표정과 행동만으로 캐릭터의 심리 상태를 전달하는 장면들은, 제가 그동안 그를 가볍게 봤구나 싶을 만큼 압도적이었습니다. 극 중반부, 유일한 동반자였던 셰퍼드 '샘'을 자신의 손으로 보내야 하는 장면에서 저는 예상치 못하게 눈물이 났습니다. 다시 봐도 그 장면만큼은 소름이 돋습니다.

모노드라마(Monodrama)적 연기 구조, 즉 단 한 명의 배우가 무대나 화면의 감정을 전부 책임지는 방식으로 영화의 대부분이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배우에 대한 극한의 도전입니다. 대사를 많이 치는 영화보다 말 없이 감정을 전달하는 영화가 훨씬 어렵다는 건,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제가 체감한 사실이기도 합니다.

텅 빈 뉴욕은 어떻게 만들었을까요?

이 영화를 촬영하면서 제작진이 부딪힌 가장 큰 벽은 바로 뉴욕이었습니다. 인류가 사라진 세상을 표현하려면 세계에서 가장 분주한 도시를 실제로 비워야 했습니다. 뉴욕시장에게 촬영 허가를 얻어낸 제작진은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 워싱턴 스퀘어, 맨해튼 5번가 블록을 전면 통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대낮에 실제 거리를 봉쇄하고 카메라를 돌린 것입니다.

이 영화가 2007년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면 더 놀랍습니다. 지금 다시 봐도 촌스럽지 않고 오히려 현실감이 넘칩니다. 반지의 제왕처럼 새로운 세계관을 창조한 영화는 시대를 타지 않는 측면이 있지만, 현실 도시를 배경으로 한 영화는 시대적 흔적이 금방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17년이 지난 지금 봐도 몰입감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제 경험상 이건 꽤 드문 일입니다.

이 작품의 비주얼 완성도에는 여러 스태프의 공이 컸습니다. 반지의 제왕 촬영에 참여했던 앤드류 레즈니가 카메라를 잡았고, 매트릭스에서 시각 효과를 담당했던 자넥 시어스가 모션 캡처(Motion Capture) 기술을 활용해 다크 시커를 구현했습니다. 모션 캡처란 실제 배우의 움직임을 디지털 데이터로 변환해 가상의 캐릭터에 입히는 기술을 말합니다. 덕분에 다크 시커들의 움직임이 단순한 CG가 아니라 살아있는 생물처럼 느껴졌던 겁니다. 미션임파서블을 맡았던 스턴트 감독 빅 암스트롱이 액션 시퀀스를 연출한 것도 영화의 긴장감을 한층 끌어올린 요인이었습니다.

이 영화가 얼마나 공들인 작품인지는 아래 제작 포인트만 봐도 짐작이 갑니다.

  1. 뉴욕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 워싱턴 스퀘어, 맨해튼 5번가 블록을 실제로 전면 통제하며 촬영했습니다.
  2. 반지의 제왕 촬영감독 앤드류 레즈니가 폐허가 된 뉴욕의 서정적 미장센을 완성했습니다.
  3. 매트릭스의 시각 효과 감독 자넥 시어스가 모션 캡처로 다크 시커를 실감나게 구현했습니다.
  4. 미션임파서블 스턴트 감독 빅 암스트롱이 액션 시퀀스의 강도를 책임졌습니다.

원작 소설이 왜 전설이 된 걸까요?

영화 제목이 나는 전설이다인 이유가 단순히 주인공이 전설적 존재여서라고 생각했다면, 원작 소설을 알고 나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이 영화의 원작은 리처드 매드슨이 1954년 발표한 동명의 SF 소설입니다. 이 소설은 스티븐 킹에게 작가의 꿈을 심어준 작품으로 알려져 있으며, 스티븐 킹은 자신의 두 번째 장편 살렘스 롯에 이 소설의 설정을 직접 가져다 썼습니다.

미국을 대표하는 SF 작가 레이 브래드버리는 리처드 매드슨에 대해 "20세기에 그와 그의 작품을 빼놓고 장르 소설을 이야기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인류가 괴생명체로 변해가는 세계에서 유일한 정상 인간으로 살아가는 이야기는, 사실 반대로 읽히기도 합니다. 다수가 된 괴생명체 입장에서 보면, 네빌이야말로 이상한 존재, 즉 전설(Legend)이 되는 구조입니다. 이 역설적 서사가 이 소설이 수십 년간 걸작으로 불리는 이유입니다.

저는 SF 장르 소설을 즐겨 읽는 편이 아닌데, 이 영화를 계기로 원작 소설에 관심이 생겼습니다. 묵시록적 서사(Apocalyptic Narrative), 즉 문명의 종말을 배경으로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는 이야기 구조는 소설이든 영화든 사람의 본능적인 무언가를 건드리는 것 같습니다. 이 영화가 단순한 장르물을 넘어 오래 기억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리처드 매드슨의 원작 소설에 대한 더 깊은 정보는 SF 데이터베이스 ISFDB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결국 나는 전설이다는 무서운 영화를 싫어하던 제가 다시 보고, 또 다시 보게 된 몇 안 되는 영화가 됐습니다. 2007년 이후 수많은 아포칼립스 영화가 나왔지만, 이 영화가 남긴 쓸쓸한 여운을 대체한 작품을 저는 아직 만나지 못했습니다. 주말 저녁에 조명을 낮추고 혼자 보기 딱 좋은 영화입니다. 단, 강아지를 키우고 있다면 샘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시길 권합니다.

--- 참고: https://blog.naver.com/soqhanf0932/222317775471 https://www.isfdb.org/cgi-bin/title.cgi?416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