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덕혜옹주를 책에서 배운 지식으로만 알고 있다고 꽤 자신했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서 팩트를 하나씩 찾아보니, 제가 알고 있다고 믿었던 것들 중 상당수가 영화가 만들어낸 이미지였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감동은 받았는데 뭔가 찜찜한 기분, 혹시 여러분도 이런 경험 있으신가요?
역사왜곡 논란, 어디까지가 픽션인가
영화 덕혜옹주를 보고 나서 가장 먼저 든 의문은 하나였습니다. "내가 책에서 읽었던 내용이랑 왜 이렇게 다르지?" 제가 어릴 때부터 어머니가 즐겨 읽으시던 덕혜옹주 관련 책을 곁에서 봐왔던 터라, 영화 속 장면들이 유독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손에 메모를 해뒀다가 나중에 하나씩 확인해봤는데, 꽤 많은 부분이 실제 역사와 달랐습니다.
역사왜곡(歷史歪曲)이란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 사실을 의도적으로 다르게 서술하거나 묘사하는 행위를 뜻합니다. 영화나 소설 같은 창작물에서는 극적 효과를 위해 어느 정도의 각색이 허용되지만, 이 영화는 그 선이 꽤 두껍게 그어진 사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실제로 확인해보면 다음과 같은 차이들이 존재합니다.
- 영화 속 덕혜옹주는 일본 옷 착용을 완강히 거부하는 민족의식의 상징으로 그려졌지만, 실제 기록에 따르면 소학교 시절부터 일본 옷을 자주 입었다고 전해집니다.
- 한글학교 설립과 조선인 노동자 격려 연설 장면은 모두 창작입니다. 덕혜옹주는 독립운동에 가담한 기록이 거의 없으며, 실제 성격은 영화와 달리 매우 내성적이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 귀국을 도운 인물은 영화 속 김장한이 아니라 실제로는 그의 형인 김을한이며, 김장한은 그 이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습니다.
- 영화는 조선 민중이 덕혜옹주를 극진히 아끼는 것처럼 묘사하지만, 당시 일제로부터 막대한 품위유지비를 받으며 생활하던 조선 황실에 대한 민중의 시선은 냉소적인 측면도 있었다고 합니다.
- 덕혜옹주의 정신분열 발병 시점은 영화가 암시하는 것보다 훨씬 이른 1930년으로, 해방 이후가 아닌 일본 체류 중에 이미 발병했습니다.
정략결혼(政略結婚)이란 개인의 감정이나 의사와 무관하게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이루어지는 결혼을 말합니다. 영화에서 덕혜옹주와 소 다케유키의 결혼은 순전한 피해의 서사로만 그려지지만, 실제 남아 있는 기록들을 보면 소 다케유키는 덕혜옹주와의 결혼 생활을 위해 나름대로 노력했던 인물로 평가받기도 합니다. 이런 부분은 오히려 영화가 가려버린 팩트라는 점에서 저는 더 안타깝게 느껴졌습니다.
그렇다고 이 영화를 나쁘게만 볼 수는 없습니다. 역사를 모르는 사람들이 이 영화 한 편으로 덕혜옹주라는 인물에 관심을 갖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역할을 다한 것 아닐까요? 제 동생이 딱 그런 경우였으니까요.
실제 역사가 더 먹먹한 이유
영화보다 실제 역사가 더 가슴을 치는 장면들이 있습니다. 혹시 덕혜옹주가 일본에 머무는 내내 보온병을 가지고 다니며 그 안에 담긴 물만 마셨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나요? 저는 이 부분을 확인하고 한참 멍하니 있었습니다. 아버지 고종 황제가 독살당하는 장면을 목격한 이후, 그 누구도 믿지 못하게 된 어린 황녀가 선택한 방식이 평생 자기 손으로 가져온 물만 마시는 것이었다니.
독살(毒殺)이란 독을 사용하여 사람을 살해하는 행위를 뜻합니다. 고종 황제의 독살 여부는 역사학계에서 지금도 논의가 이어지고 있는 사안입니다. 국사편찬위원회에 따르면 고종은 1919년 1월 21일 승하했으며, 당시 일제 측의 독살 의혹이 강하게 제기되어 3·1 운동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기도 했습니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그리고 1962년, 드디어 고국으로 돌아온 덕혜옹주의 실제 사진을 처음 봤을 때의 감정은 영화 속 손예진의 연기와는 또 다른 무게였습니다. 이미 고국을 알아보지 못하는 상태였다고 하는데, 그 장면을 머릿속에 그려보면 그 어떤 영화적 연출보다 훨씬 처참합니다. 영화는 그 순간을 아름답게 포장했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았을 테니까요.
왕족 미화(王族 美化)란 왕실 구성원의 실제 행적이나 처지를 실제보다 긍정적이고 영웅적으로 묘사하는 경향을 뜻합니다. 이 영화가 받은 가장 큰 비판 중 하나가 바로 이 지점입니다. 덕혜옹주 개인의 비극은 분명 사실이지만, 그것이 곧 조선 민중 전체의 서사와 자동으로 겹쳐지는 것처럼 연출한 부분은 과한 면이 있다는 지적입니다. 제 경험상 이런 감정적 혼선이 오히려 역사를 제대로 보는 눈을 흐리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란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에 강제 병합된 시점부터 1945년 광복까지의 기간을 가리킵니다. 이 시기를 다룬 영화나 드라마가 많지만, 국가기록원 독립운동 관련 자료들을 보면 실제 역사의 무게는 어떤 영상 매체로도 온전히 담아내기 어렵다는 걸 느끼게 됩니다. (출처: 국가기록원)
손예진의 연기, 영화는 어떻게 볼 것인가
역사 왜곡 논란을 인지하고 다시 영화를 떠올려봐도, 손예진의 연기만큼은 솔직히 할 말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배우가 노년 분장을 하고 연기할 때 어느 순간 몰입이 깨지는 경험을 하신 적 있으신가요? 저는 이 영화에서 단 한 번도 그런 느낌을 받지 못했습니다. 특히 노년의 덕혜옹주로 등장하는 장면에서 눈빛 하나만으로 수십 년의 세월을 담아냈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그건 정말 보기 전까지는 상상이 안 됐던 수준이었습니다.
연기 앙상블(Ensemble)이란 주연뿐 아니라 조연과 단역까지 극 전체의 배우들이 유기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연기 방식을 뜻합니다. 이 영화에서 라미란이 연기한 덕혜옹주의 유모 캐릭터가 딱 그런 역할을 해줬습니다. 주연의 감정선을 넘치지도 꺾지도 않으면서 끝까지 받쳐줬고, 귀국 장면에서의 상봉 연기는 주연보다 오히려 더 먼저 눈물이 터지게 만들었습니다. 제가 직접 영화관에서 그 장면을 봤을 때, 옆에 앉은 분도 조용히 눈물을 닦고 있었습니다.
박해일의 김장한 역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앞서 언급했듯 김장한은 실제로는 귀국을 돕기 전에 먼저 세상을 떠난 인물이지만, 영화 속에서 그가 만들어낸 묵직하고 다정한 존재감은 픽션임을 알면서도 자꾸 감정이 이입되게 만들었습니다. 이게 영화의 힘이기도 하고, 동시에 역사 왜곡 비판을 받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 두 감정을 분리해서 받아들이는 것이 이 영화를 제대로 소화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친일반민족행위(親日反民族行為)란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식민 지배를 돕거나 민족의 이익에 반하는 행위를 한 것을 뜻하며, 관련 법률에 따라 대상자가 공식 지정되어 있습니다. 영화 속 악역 한택수의 실제 모델인 한창수는 친일반민족행위자 704인 명단에 공식 등재된 인물입니다. 이 점은 영화가 픽션 속에서도 분명하게 사실을 짚어낸 부분이라고 봅니다.
결국 덕혜옹주는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전달하는 다큐멘터리가 아닙니다. 감동을 위해 과감하게 각색된 상업 영화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영화를 보면서 감동을 받되, 그 감동이 어디서 온 건지 한 번쯤 의심해보는 것 아닐까요? 영화를 본 뒤 실제 덕혜옹주의 생애를 조금이라도 찾아보셨다면, 이 글이 그 출발점이 됐으면 합니다. 영화 한 편이 한 사람의 역사를 다시 들여다보게 만든다면, 그게 바로 이런 작품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