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이 아름다운 건 이루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역설이 가장 솔직하게 구현된 영화가 있습니다. 구파도 감독의 2011년작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입니다. 제가 처음 이 영화를 본 건 거실 조명을 죄다 끄고 혼자 앉아 있던 어느 늦은 밤이었는데, 102분이 지나고 나서도 자리에서 일어나질 못했습니다.
첫사랑, 미화 없이 그대로
대부분의 로맨스 영화가 첫사랑을 다룰 때 흔히 빠지는 함정이 있습니다. 바로 이상화(idealization), 즉 실제보다 훨씬 아름답고 완벽하게 기억을 채색하는 심리적 왜곡입니다. 쉽게 말해 현실에서는 절대 없을 법한 완벽한 고백 장면과 영화 같은 타이밍을 만들어내는 거죠.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는 그 공식을 거부합니다.
주인공 커징텅(가진동 분)은 반에서 소문난 문제아입니다. 그가 수업 시간에 장난을 치다 걸려 모범생 션자이(진연희 분) 앞자리에 앉게 되는 벌칙을 받으면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이후 두 사람이 가까워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제가 직접 겪어봤는데 싶었던 장면이 한두 개가 아니었습니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괜히 말을 심하게 하고, 자존심 때문에 먼저 연락을 못 하고, 나중에 "그때 왜 그랬을까" 싶어지는 그 장면들 말입니다.
영화는 이 서툶을 묘하게 감정 이입(emotional identification), 즉 관객이 캐릭터의 심리 상태를 자신의 것처럼 느끼는 심리 현상으로 끌고 갑니다. 격투 대회를 열어 션자이에게 강한 모습을 보이려다 오히려 그녀의 걱정 어린 잔소리를 "유치하다"고 받아치며 돌아서는 커징텅을 보면서,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저렇게까지 못나게 굴 수 있나 싶었는데, 동시에 저도 저랬던 적 있다는 게 떠올라서 더 불편했습니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가 2011년 대만에서 개봉했을 당시 역대 최고 흥행 기록을 경신했다는 사실(출처: 한국영상자료원 KMDB)은, 이 현실적인 서사가 얼마나 많은 사람의 기억을 건드렸는지를 방증합니다. 화려한 반전도, 억지스러운 비극도 없이 그냥 "그랬던 것"들을 담담히 나열했을 뿐인데 극장이 꽉 찼다는 건 결국 진짜 기억에 가장 가까운 영화라는 뜻이겠죠.
대만 감성 영화 특유의 미장센이 만드는 온도
미장센(mise-en-scène)이란 프랑스어에서 온 영화 용어로, 화면 안에 배치된 모든 시각적 요소들의 총체를 뜻합니다. 배우의 위치, 조명, 소품, 색감이 모두 포함됩니다. 이 영화의 미장센이 특별한 이유는 거창한 세트나 과장된 색보정 없이도 감정을 정확하게 전달한다는 점입니다.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많은 청춘 영화들이 미장센을 꾸밈의 도구로 씁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카메라는 커징텅이 하교길에 션자이의 등 뒤에서 무심한 척 자전거 페달을 밟는 장면을 그냥 옆에서 바라보듯 찍습니다. 눈부신 햇살과 바람에 흔들리는 교복 셔츠 뒷모습. 그 조합이 만들어내는 온도가 있습니다. 특별한 음악도, 슬로모션도 없는데 왜인지 모르게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이 영화가 구사하는 서정적 리얼리즘(lyrical realism)이라는 연출 문법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서정적 리얼리즘이란 일상의 평범한 풍경을 사실적으로 포착하되, 그 안에 시적인 감수성을 녹여내는 방식입니다. 비 내리는 공중전화 부스에서의 오열 장면, 풍등에 소원을 적어 하늘로 날려 보내는 장면이 모두 이 문법 위에 서 있습니다. 거창한 장치 없이도 관객의 어딘가에 꽂히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고 봅니다.
가수 호하가 부른 주제가 'Those Years'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피아노 선율이 깔리다가 오케스트레이션이 쌓이는 구조인데, 영화 전반부에서는 멀리서 들리는 것처럼 조용하게 깔리다가 클라이맥스에서 터집니다. 음악 자체가 감정의 타임라인을 설계한 것처럼 느껴진다고 할까요. 제가 이 곡을 처음 들었을 때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자동으로 떠올랐을 정도였습니다.
이 영화가 시각적으로, 청각적으로 특별하게 작동하는 요소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자연광을 최대한 활용한 교실과 하교길 촬영으로 인위적인 감정 조작 없이 공간 자체가 기억처럼 느껴지게 만든 점
- 주인공 두 사람의 거리감을 카메라 거리로 그대로 표현해, 관계의 온도를 대사 없이 전달한 촬영 방식
- 호하의 주제가 'Those Years'가 극의 감정 구조와 정확하게 동기화되어 클라이맥스에서 폭발적인 몰입감을 만들어내는 음악 레이아웃
결혼식 피날레가 남긴 여운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를 처음 봤을 때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성인이 된 커징텅이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션자이의 결혼식에 참석하는 장면. 저는 그 설정을 보자마자 이제 본격적으로 슬퍼지겠구나 마음의 준비를 했습니다. 그런데 영화는 그렇게 흐르지 않습니다.
션자이의 남편이 엉뚱한 내기를 제안하고, 커징텅이 그 자리에서 션자이에게 달려가 입을 맞추는 장면. 그 순간 화면은 평행 세계(parallel world), 즉 만약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함께했을 또 다른 현실의 장면들로 교차됩니다. 평행 세계란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은 선택지가 다른 차원에서 실현되었다는 개념으로, 이 영화에서는 이루어지지 못한 첫사랑의 가능성을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장치로 쓰였습니다.
그 교차 편집(cross-cutting), 즉 두 개 이상의 장면을 번갈아 보여줌으로써 심리적 대비와 감정의 증폭을 만들어내는 편집 기법이 이 영화에서 거의 완벽하게 구현되었다고 봅니다. 현실의 결혼식장과 상상 속 평행 세계가 겹쳐지는 그 몇 분 동안, 저는 화면을 보면서 눈물이 날 것 같으면서도 웃음이 나오는 이상한 감정을 느꼈습니다. 제가 경험한 거의 모든 청춘 영화 중에서 그런 감정을 동시에 준 영화는 이것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영화가 단순히 첫사랑의 아쉬움을 넘어서는 이유는, 커징텅이 결국 션자이의 행복을 진심으로 축복하는 방식 때문입니다.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이 곧 실패가 아니라는 것을 가장 유쾌하고 가슴 찡하게 보여주는 장면이었습니다. 결혼식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결혼 축하해, 나의 청춘"이라는 마지막 내레이션이 흐를 때, 저는 그게 션자이를 향한 말이 아니라 그 시절 자신을 향한 작별 인사처럼 들렸습니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는 넷플릭스에서 가볍게 볼 수 있는 102분짜리 영화지만, 보고 난 뒤 생각이 꽤 오래 남는 작품입니다. 첫사랑을 미화하지 않고, 그렇다고 지나치게 슬프게 끝내지도 않는 균형이 이 영화의 진짜 힘입니다. 혼자 조용히, 가능하면 조명을 낮추고 보시길 권합니다. 보다 보면 이 영화가 당신만의 어떤 기억 하나를 정확하게 건드릴 거라고 생각합니다.
--- 참고: https://blog.naver.com/daily_routine_98/224120794910 https://www.kmdb.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