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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니 데이 인 뉴욕 (뉴욕 감성, 미장센, 우디 앨런)


우디 앨런 영화는 스토리가 빈약하다는 말,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그런데 저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조금 의아했습니다. 스토리가 없는 게 아니라, 스토리보다 더 중요한 걸 담고 있는 거 아닐까요? 제가 <레이니 데이 인 뉴욕>을 두 번, 세 번 다시 틀었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뉴욕 감성 — 비 오는 도시가 영화의 주인공이 되는 방식

일반적으로 로맨스 영화는 두 사람의 감정선을 따라가는 것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레이니 데이 인 뉴욕>을 보고 나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이 영화에서 진짜 주인공은 뉴욕이라는 도시 자체였습니다. 제 경험상 이건 꽤 드문 경우입니다. 배경이 배경에 머무르지 않고, 인물의 내면을 대신 말해주는 공간으로 기능하는 영화가 많지 않거든요.

영화는 맨해튼(Manhattan), 즉 뉴욕 섬의 핵심 자치구를 배경으로 펼쳐집니다. 맨해튼이란 센트럴 파크,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브로드웨이 등 뉴욕을 상징하는 장소들이 밀집한 곳으로,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문화 밀도를 자랑하는 지역입니다. 우디 앨런은 이 공간을 단순한 촬영 장소가 아니라 서사의 일부로 활용합니다. 비에 젖은 골목, 메트로폴리탄의 조용한 복도, 피아노 소리가 새어 나오는 친구 집 거실 — 이 장면들은 대사 없이도 개츠비라는 인물이 어떤 감성을 가진 사람인지 설명해줍니다.

저는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아, 뉴욕에 한 번이라도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솔직히 그 전까지는 뉴욕이라는 도시가 그냥 크고 복잡한 곳이라는 인상이 전부였는데,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처음으로 비 오는 뉴욕 거리를 걷고 싶다는 구체적인 감정이 생겼습니다. 영화가 관광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게 아니라, 그 도시의 특정한 '결'을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이때 처음 체감했습니다.

미장센(mise-en-scène)이라는 개념이 여기서 빛을 발합니다. 미장센이란 프랑스어에서 온 영화 용어로, 화면 안에 배치되는 모든 시각적 요소 — 조명, 배우의 위치, 소품, 배경 — 를 감독이 의도적으로 구성하는 방식을 뜻합니다. 우디 앨런은 비 오는 바깥 풍경과 황금빛 조명이 켜진 실내를 극명하게 대비시키는 방식으로, 개츠비가 찾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대사 대신 화면으로 설명합니다. 처음에는 그냥 예쁜 장면이라고 넘겼는데, 두 번째 볼 때 이게 전부 계산된 구성이라는 걸 알고 나서 감탄했습니다.

미장센 분석 — 재즈와 우연이 만드는 서사의 구조

스토리가 허술하다는 말이 우디 앨런 영화에 자주 따라붙는데, 제 경험상 이건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전통적인 서사 구조(narrative structure), 즉 기승전결이 뚜렷하고 갈등이 명확하게 해소되는 방식을 기대한다면 분명히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서사 구조란 이야기가 전개되고 해결되는 논리적인 틀을 말합니다. 그런데 <레이니 데이 인 뉴욕>은 애초에 그 틀을 따르려 하지 않습니다.

이 영화의 중심에는 우연의 연쇄가 있습니다. 개츠비(티모시 샬라메 분)와 약혼녀 애슐리(엘르 패닝 분)가 함께 보내려 했던 주말은, 애슐리가 영화감독 인터뷰를 계기로 할리우드 인맥에 끌려다니면서 완전히 어긋납니다. 개츠비는 홀로 뉴욕을 떠돌고, 그 과정에서 옛 지인 챈(셀레나 고메즈 분)과 우연히 재회합니다. 이 설정이 허술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저는 오히려 이 구조가 인생을 더 솔직하게 반영한다고 생각합니다. 계획대로 흘러가는 날이 얼마나 드문가요.

영화 전반을 채우는 재즈 사운드트랙(jazz soundtrack), 즉 즉흥 연주와 복잡한 화음이 특징인 미국 대중음악 장르의 선곡도 이 우연의 감각과 맞닿아 있습니다. 특히 개츠비가 피아노 앞에 앉아 부르는 'Everything Happens to Me'는 저한테는 이 영화 전체를 압축한 한 곡처럼 느껴집니다. "모든 일이 나에게 일어난다"는 제목처럼, 계획이 아니라 우연이 삶의 방향을 바꾼다는 감각. 산 위에서 좋아하는 풍경이 펼쳐질 때나 눈 오는 날 이 노래를 틀면 이상하게 잘 어울린다는 말도 있는데, 듣고 보니 정말 그랬습니다.

<레이니 데이 인 뉴욕>에서 제가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개츠비가 애슐리와 헤어지는 순간의 대사였습니다. "넌 귀뚜라미 소리를 좋아하고 난 덜컹대는 차 소리를 좋아하고, 넌 햇빛 아래 피어나고 난 흐린 하늘 아래 힘이 난다." 이 한 줄이 이별의 이유를 이렇게 정확하게 설명한 경우를 저는 다른 영화에서 본 적이 없습니다. 불화나 배신이 아니라, 그냥 다른 것들을 좋아하는 두 사람이라는 것.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이별을 이렇게 조용하고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게.

영화 비평가들 사이에서도 이 작품의 미장센과 감성적 완성도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지만, 로튼 토마토(Rotten Tomatoes)에서 관객 점수가 비평가 점수를 크게 웃도는 현상은, 이 영화가 이론적 분석보다 감각적 체험에 가까운 작품임을 보여줍니다. 제 경험도 그랬습니다. 처음 볼 때는 "이게 왜 좋지?"라는 생각이 들다가, 두 번째부터 자꾸 생각나는 영화였습니다.

우디 앨런 — 논란과 영화를 어떻게 분리해서 볼 것인가

이 영화를 이야기할 때 우디 앨런의 개인적 논란을 빼놓기가 어렵습니다. 실제로 이 작품은 감독의 성추문으로 인해 미국에서 정식 극장 개봉이 오랫동안 막혀 있었고, 아마존이 배급을 포기하면서 수년간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의 행동에 대해 저는 여기서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이 상황이 영화 자체와는 별개라는 점은 분명히 해두고 싶습니다.

작가와 작품을 분리해서 볼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현재 영화계와 예술계 전반에서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습니다. 이를 '작가-작품 분리론'이라고도 부릅니다. 작가-작품 분리론이란 창작자의 도덕적 결함이나 범죄 행위가 그 사람이 만든 작품의 예술적 가치에 영향을 주어야 하는가에 대한 미학적·윤리적 논쟁입니다. 일반적으로 이 두 가지를 완전히 분리할 수 있다고 보는 시각도 있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이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완전한 분리도, 완전한 거부도 쉽지 않은 지점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다시 꺼내 보는 이유는, 티모시 샬라메와 셀레나 고메즈를 비롯한 배우들의 연기와 뉴욕이라는 공간이 만들어낸 감각이 그 논란과 무관하게 실재하기 때문입니다. 캐릭터 아크(character arc), 즉 인물이 영화 안에서 내면적으로 변화하고 성장하는 과정이라는 개념에서 보자면, 개츠비가 어머니의 기대와 어긋난 관계라는 틀에서 벗어나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것을 향해 걸어가는 흐름은 꽤 설득력 있게 그려졌습니다. 이 부분은 감독이 누구든 잘 만들어진 장면입니다.

<레이니 데이 인 뉴욕>을 보기 전에 알아두면 더 풍부하게 즐길 수 있는 포인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재즈 음악에 귀를 기울이세요. 대사와 함께 감정의 밀도를 높이는 역할을 합니다.
  2. 개츠비와 애슐리의 동선이 어떻게 엇갈리는지 주의해서 보세요. 두 사람이 같은 뉴욕에 있으면서 완전히 다른 하루를 보냅니다.
  3. 챈이 처음 등장하는 장면과 마지막 장면을 비교해보세요. 짧은 분량이지만 이 캐릭터가 영화의 결말을 어떻게 이끄는지가 보입니다.
  4. 뉴욕의 실내와 실외 조명 대비를 의식하며 보면 미장센이 다르게 느껴집니다.

우디 앨런 영화에 대한 학술적 논의는 크라이테리언(The Criterion Collection)에서도 다양하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영화 미학에 관심이 있다면 함께 참고해볼 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