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이 영화를 다시 틀었던 날은 번아웃(Burnout)이 한창 심했던 시기였습니다. 번아웃이란 과도한 스트레스가 누적되어 신체적·정신적 에너지가 완전히 소진된 상태를 뜻합니다. 그 상태에서 거실 조명을 끄고 소파에 누워 재생 버튼을 눌렀는데, 20년 전 만들어진 영화가 제 마음을 이렇게까지 건드릴 줄은 정말 예상 밖이었습니다. 2005년 개봉한 팀 버튼 감독의 <찰리와 초콜릿 공장>은 지금 봐도 그 힘이 조금도 식지 않은 영화입니다.
황금티켓 한 장이 말해주는 것
찰리와 초콜릿 공장을 보면서 제가 가장 먼저 마음에 걸렸던 장면은, 주인공 찰리 버킷이 길바닥에서 주운 동전으로 초콜릿을 사는 장면이었습니다. 단 하나의 초콜릿 바에서 황금티켓이 나온다는 설정이 자칫 억지스러울 수 있는데, 이 영화는 그 행운을 캐릭터의 덕성(virtue)과 연결시켜 설득력을 만들어 냅니다. 덕성이란 인간이 갖추어야 할 도덕적 탁월함을 의미하는 개념입니다.
찰리는 생일날 딱 한 번 초콜릿을 먹을 수 있을 만큼 가난한 아이입니다. 황금티켓 5장이 전 세계에 뿌려진다는 전제를 감안하면, 확률적으로 찰리가 티켓을 얻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영화는 이 행운을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이 아이라면 받아 마땅하다는 정서적 개연성으로 포장합니다. 처음 봤을 때는 "좀 작위적이지 않나?" 싶었는데, 뒤돌아보니 그게 바로 동화의 문법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서사 구조(narrative structure) 측면에서도 흥미롭습니다. 서사 구조란 이야기가 전개되는 방식과 인과관계의 배열을 뜻합니다. 황금티켓을 얻는 아이들 다섯 명은 각자 하나씩 뚜렷한 결함을 지니고 있고, 찰리만이 그 결함 없이 순수하게 공장에 발을 들입니다. 이 대조가 이후 벌어지는 모든 사건의 뼈대가 됩니다. 이렇게 인물의 성격이 서사의 엔진이 되는 구조는, 단순한 동화를 넘어서 어른도 충분히 읽어낼 수 있는 층위를 만들어 줍니다.
움파룸파, 한 명이 만들어낸 카피&페이스트의 마법
공장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부터 영화의 비주얼 언어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제가 처음 이 장면을 봤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걸 어떻게 찍은 거지?"였습니다. 초콜릿 강과 사탕 폭포, 먹을 수 있는 식물들로 가득 찬 공장 내부는 미장센(mise-en-scène)의 교과서 같은 장면입니다. 미장센이란 화면 안에 배치된 모든 시각적 요소, 즉 배경, 조명, 의상, 배우의 위치 등을 총체적으로 지칭하는 영화 연출 용어입니다.
그중에서도 움파룸파 캐릭터는 이 영화의 숨겨진 기술적 성취라고 생각합니다. 무수히 많은 움파룸파가 동시에 등장하는 장면들이 실은 단 한 명의 배우, 딥 로이(Deep Roy)가 연기한 것을 디지털 합성으로 복제한 결과입니다. 쉽게 말해 진짜 Ctrl+C, Ctrl+V를 화면 위에서 실현한 셈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나서 다시 보면 움파룸파 장면이 전혀 다르게 보입니다. 어색한 반복감이 아니라, 오히려 그 통일성이 공장 전체의 기이하고 질서정연한 분위기를 더 잘 살려줍니다.
대니 엘프만(Danny Elfman)이 작곡한 움파룸파의 테마곡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악보 구성 자체가 각 아이의 결함에 맞춰 조금씩 변주되는데, 이는 라이트모티프(leitmotif) 기법을 활용한 것입니다. 라이트모티프란 특정 인물이나 상황이 등장할 때마다 반복적으로 흘러나오는 음악적 주제를 뜻하며, 관객이 무의식중에 인물의 상황을 감정적으로 연결하도록 돕는 장치입니다. 아이 하나가 퇴장할 때마다 흘러나오는 조금씩 다른 버전의 노래 덕분에, 저는 그 퇴장 장면들에서 웃으면서도 묘하게 씁쓸한 감정을 동시에 느꼈습니다.
움파룸파가 등장하는 시퀀스에서 드러나는 팀 버튼 특유의 연출 감각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 단 한 명의 배우를 디지털 합성으로 수십 명으로 복제해, 공장의 비현실적인 질서감을 시각적으로 완성했습니다.
- 아이가 퇴장할 때마다 움파룸파의 노래 장르와 편곡이 달라져, 같은 상황의 반복을 지루하지 않게 변주했습니다.
- 움파룸파의 표정과 몸짓이 극도로 무표정하게 설계되어, 코믹함과 섬뜩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팀 버튼식 잔혹 동화의 톤을 유지합니다.
가족의 가치, 그 뻔할 수 있었던 결말이 뻔하지 않은 이유
사실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구조적으로 보면 꽤 단순합니다. 착한 아이가 이기고, 욕심 많은 아이들은 벌을 받고, 마지막에 가족이 하나로 모입니다. 제가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는 그 결말이 조금 교훈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던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다시 보면 볼수록 이 영화가 그 '뻔한 구조'를 얼마나 영리하게 비틀었는지가 보입니다.
윌리 웡카가 찰리에게 공장의 후계자 자리를 제안하면서 내건 조건이 "가족을 포기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찰리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거절합니다. 저는 이 장면을 볼 때마다 온몸에 소름이 돋습니다. 거대한 공장 전체, 세계 최고의 초콜릿 제국을 발로 차는 그 선택이 설득력을 갖는 이유는, 영화가 앞서 찰리네 가족의 온기를 충분히 쌓아두었기 때문입니다. 감정의 축적이 없었다면 이 장면은 그냥 착한 아이의 착한 행동으로 끝났을 겁니다.
영화는 동시에 웡카의 트라우마(trauma)를 통해 이 주제를 보강합니다. 트라우마란 심리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사건으로 인해 형성된 지속적인 정서적 상처를 뜻합니다. 웡카가 치과의사인 아버지와의 단절 속에서 성장했고, 그 결핍이 기괴한 천재로 이어졌다는 서사는 찰리의 이야기와 완벽하게 대칭됩니다. 가진 것이 없지만 가족이 있는 아이와, 가진 것은 모두 있지만 가족을 잃은 어른. 이 두 캐릭터의 거울 구조가 영화 전체를 단단하게 받쳐줍니다.
영화가 다루는 이런 심리적 서사는 실제 아동 발달 연구에서도 뒷받침됩니다. 아동의 정서 안정과 회복탄력성에서 가족 유대감이 핵심 변수라는 사실은 다수의 연구에서 확인된 바 있습니다(출처: NCBI 가족 유대감과 아동 발달 연구). 팀 버튼이 의도했든 아니든, 이 영화의 결말은 그 연구들이 말하는 바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이 영화를 요즘 다시 보면서 든 생각은, 이 작품이 진짜 문제를 해결해 주는 영화라는 점입니다. 무언가를 많이 갖고 싶거나, 반대로 너무 많이 잃은 것 같아 지쳐있을 때, 찰리가 공장을 걸어 나오는 그 장면 하나가 의외로 많은 것을 정리해 줍니다. 이번 주말 거실 조명을 낮추고 초콜릿 하나 손에 쥐고 틀어보시기 바랍니다. 아이와 함께라면 더 좋고, 혼자라도 충분히 좋은 영화입니다.
--- 참고: https://blog.naver.com/something810/221223818835 https://www.ncbi.nlm.nih.gov/pmc/articles/PMC35609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