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후에 영화를 보면 오히려 더 우울해진다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한동안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런데 <중경삼림>을 보고 난 뒤로 그 생각이 완전히 뒤집혔습니다. 왕가위 감독이 1994년에 내놓은 이 홍콩 영화는 이별의 감정을 파고들면서도, 보고 나면 이상하게 기운이 생기는 작품입니다. MZ 세대 사이에서 다시 회자되는 이유가 분명히 있다는 걸, 직접 보고 나서야 납득했습니다.
이별을 극복하는 방식이 이렇게 달라도 되나요
실연(失戀), 그러니까 사랑을 잃은 상태에서 사람들이 취하는 행동은 제각각입니다. 울거나, 잠을 못 자거나, 밥을 굶거나. 그런데 <중경삼림>의 경찰 223(금성무 분)은 다릅니다. 5년을 사귄 여자친구에게 만우절에 이별 통보를 받자, 그는 유통기한이 5월 1일인 파인애플 통조림을 미친 듯이 사 모으기 시작합니다. 한 달 안에 마음을 정리하겠다는 기한을 스스로 정하고, 그 날짜를 통조림 캔에 새긴 셈입니다.
처음에는 이 설정이 그냥 기묘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게 꽤 현실적인 이야기입니다. 우리도 "딱 이번 주까지만 슬퍼하자"는 식으로 스스로 기한을 정해본 경험이 한 번쯤은 있지 않으신가요? 저도 비슷한 시기를 보냈을 때 달력에 날짜를 표시해두던 기억이 납니다. 결국 그 날이 와도 마음이 정리되지 않았지만요.
두 번째 에피소드의 경찰 663(양조위 분)은 또 다릅니다. 스튜어디스 여자친구와 헤어진 그는 집안의 수건, 비누, 인형에게 말을 겁니다. 이 장면에서 쓰인 연출 기법이 바로 의인화(擬人化)입니다. 의인화란 사람이 아닌 대상에 감정과 말을 부여하는 표현 방식인데, 왕가위는 이걸 단순한 유머가 아닌 고독의 언어로 씁니다. 혼자 사는 사람이 집에 말을 거는 그 장면이, 슬프면서도 너무 공감이 돼서 한참 멍하니 화면을 바라봤습니다.
두 에피소드의 이별 극복 방식을 비교해보면 이렇습니다.
- 경찰 223: 유통기한이 정해진 통조림을 집착적으로 수집하며 스스로에게 감정 정리의 마감일을 부여한다.
- 경찰 663: 집안의 사물과 대화를 나누며 감정을 외부로 투사하고, 새로운 사람의 침입(?)을 통해 공간이 먼저 바뀐다.
- 공통점: 둘 다 직접적으로 "극복했다"고 선언하지 않는다. 영화는 그 과정을 관객이 느끼게만 해준다.
이 구조가 일반적인 멜로 영화와 다른 지점입니다. 감정을 설명하지 않고 행동으로 보여주는 방식, 그게 이 영화가 30년이 지나도 낡지 않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홍콩이라는 공간이 만들어낸 감각
청킹맨션(Chungking Mansions)이라는 장소를 아시나요? 홍콩 침사추이에 실제로 존재하는 이 건물은 1부 에피소드의 핵심 배경입니다. 금성무와 임청하가 스쳐 지나가는 복잡하고 어두운 골목, 수많은 인종이 뒤섞여 지나다니는 그 공간이 바로 청킹맨션입니다. 지금은 환전소와 소규모 식당들이 들어선 평범한 상업 건물이지만, 영화 속에서는 마약 밀매가 이루어지는 위험하고 혼란한 장소로 그려집니다.
왕가위 감독이 이 영화에서 적극 활용한 촬영 기법 중 하나가 핸드헬드 카메라(Handheld Camera)입니다. 핸드헬드 카메라란 삼각대 없이 촬영자가 직접 손으로 들고 찍는 방식으로, 화면이 흔들리고 불안정하게 움직이는 특성이 있습니다. 이 기법이 청킹맨션의 혼잡한 복도와 홍콩 거리의 질주 장면에서 쓰이면서, 관객은 그냥 영화를 보는 게 아니라 그 골목을 같이 뛰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또 하나, 스텝 프린팅(Step Printing)이라는 기법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스텝 프린팅이란 필름의 특정 프레임을 반복 인화해 움직임을 인위적으로 늘이거나 흐리게 만드는 방식입니다. 붐비는 거리에서 인물만 선명하고 주변 사람들은 잔상처럼 흘러가는 그 장면이 바로 이 기법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도심 속 군중 안에서 느끼는 극도의 고독감을 시각화하는 데, 이보다 더 정확한 표현 방식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홍콩 영화의 전성기를 연구한 크라이테리언(Criterion Collection)의 분석에 따르면, 왕가위는 이 영화를 시나리오 없이 즉흥적으로 촬영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촬영장에서 그날그날 대사가 만들어지고, 장면이 결정됐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영화의 감정선이 이렇게 정교한 건, 어찌 보면 더 신기한 일입니다. 계획된 구조가 아니라 배우들의 현장 감각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제 경험상 이런 영화는 보는 사람도 어디선가 그 날것의 에너지를 분명히 감지하게 됩니다.
왕페이의 California Dreamin'과 엔딩이 남긴 것
이 영화에서 가장 많이 회자되는 장면 중 하나는 왕페이(王菲)가 스낵바에서 마마스 앤 파파스의 'California Dreamin''을 틀어놓고 혼자 신나게 춤을 추는 장면입니다. 처음 그 장면을 봤을 때 저는 그냥 귀여운 캐릭터 묘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조금 더 생각해보니, 이게 페이라는 인물의 전부를 담은 장면이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답답한 공간에 갇혀 있으면서도 자기만의 세계를 완벽하게 유지하는 사람. 그게 페이입니다.
음악 선택도 의도적입니다. 'California Dreamin''은 겨울에 따뜻한 캘리포니아를 그리워하는 내용의 노래입니다. 홍콩의 작고 더운 스낵바에서 이 노래를 트는 페이의 모습은, 지금 있는 곳이 아닌 다른 곳을 꿈꾸는 사람의 마음을 정확하게 대변합니다. 나중에 그녀가 진짜 캘리포니아로 떠나게 되는 전개와 연결되면서, 이 노래는 단순한 배경음악이 아닌 복선(伏線)이 됩니다. 복선이란 이후 전개를 미리 암시하는 서사 장치인데, 이 영화에서는 그 복선이 음악으로 심어져 있습니다.
엔딩은 솔직히 처음 봤을 때 조금 허무했습니다. 만나자는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고 진짜 캘리포니아로 떠나버린 페이가, 1년 뒤 스튜어디스 유니폼을 입고 돌아와 663이 인수한 가게에서 재회하는 장면. 663이 "어디로 가고 싶어요?"라고 묻고 "당신이 가고 싶은 곳이요"라고 답하는 그 마지막 대사가, 처음에는 그냥 낭만적인 마무리처럼 읽혔습니다.
그런데 다시 보니 달랐습니다. 663은 이 대사 하나로 "나는 더 이상 내 방향을 먼저 정해두지 않겠다"는 걸 선언합니다. 전 여자친구가 두고 간 흔적에 집착하던 사람이, 이제는 상대방의 방향에 자신을 맞추겠다는 변화입니다. 이별 전후의 태도가 이 짧은 대사 하나에 다 담겨 있습니다. 로튼토마토(Rotten Tomatoes)에서 전문가 신선도 87점을 기록하고 있는 이유가(출처: Rotten Tomatoes), 이런 디테일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별 후 무기력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 <중경삼림>은 꽤 괜찮은 처방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영화는 "이렇게 하면 극복할 수 있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냥 비슷한 감정을 가진 사람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버텨내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걸 보는 것만으로도 이상하게 위로가 됩니다. 넷플릭스나 왓챠 같은 국내 스트리밍 플랫폼에서 현재 서비스 여부를 먼저 확인해보시고, 가능하면 조명을 낮추고 이어폰을 끼고 보시길 권합니다. 청킹맨션의 소음과 'California Dreamin''의 기타 소리가 귓속으로 바로 들어올 때, 이 영화의 진짜 맛이 납니다.
--- 참고: https://blog.naver.com/khd3001/222665635192 https://www.criterion.com/current/posts/4107-chungking-express-love-in-the-time-of-the-handover https://www.rottentomatoes.com/m/chungking_expr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