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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보통의 연애 (찌질함, 술 로맨스, 직장 뒷담화)


로맨스 영화를 보면서 "나도 저렇게 이별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 있으신가요? 저는 솔직히 없습니다. 대부분의 로맨틱 코미디는 너무 예쁘게 헤어지고, 너무 극적으로 다시 만납니다. 그런데 2019년작 가장 보통의 연애는 다릅니다. 이별 뒤 술에 절어 전 연인에게 새벽에 문자 보내고 다음 날 후회하는, 그 창피한 이야기를 정면으로 다룹니다. 저도 영화 보면서 술 한 잔 곁들였는데, 반면교사 삼기 딱 좋았습니다.

찌질함이 공감되는 이유

로맨스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이 이 정도로 찌질해도 괜찮은 걸까요? 저는 처음에 이 질문을 품고 영화를 봤습니다. 재훈(김래원 분)은 결혼까지 약속했던 연인의 외도로 파혼한 뒤, 매일 밤 소주를 벗 삼아 전 여친에게 구구절절한 메시지를 보냅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자신이 보낸 문자를 보고 손발이 오그라드는 현실을 반복합니다.

이런 행동 패턴을 심리학에서는 강박적 반추(rumination)라고 부릅니다. 강박적 반추란 이미 지나간 사건을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되씹으며 벗어나지 못하는 심리 현상으로, 이별 이후 가장 흔하게 나타나는 반응 중 하나입니다. 재훈의 행동이 한심해 보이면서도 어딘가 낯익은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김래원의 주취 연기를 보면서 솔직히 약간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공효진이 어느 지점에서 그에게 호감을 느끼는지 처음엔 잘 납득이 안 됐거든요. 술 취한 사람이 집 앞에 쭈그려 앉아 전화를 걸어대는 장면은, 제 입장에서는 연민보다 피로감이 먼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훈에게 묘하게 감정 이입이 되는 건, 그 찌질함이 연기가 아니라 실제로 우리 모두 한 번쯤 겪어봤을 법한 감정의 밀도를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참고로 영화 안에서 재훈이 그토록 망가지면서도 다음 날 출근할 수 있었던 이유가 나중에 밝혀집니다. 회사 사장이 친구였다는 설정인데, 저는 이게 의외로 현실적인 장치라고 느꼈습니다. 맨날 술 먹고 늦게 출근하면서 짤리지 않는 직장인이 현실에 존재한다면, 딱 이 경우겠다 싶었거든요.

술 로맨스가 성립하는 조건

술이 매개가 되는 로맨스는 영화에서 자주 등장합니다. 그런데 가장 보통의 연애가 다른 작품들과 구별되는 건, 술이 단순한 낭만적 소품이 아니라 두 사람 사이의 심리적 방어막을 허무는 장치로 기능한다는 점입니다. 이것을 영화 비평 용어로 서사 촉매(narrative catalyst)라고 합니다. 서사 촉매란 이야기의 흐름을 전환시키는 결정적 계기를 뜻하는데, 이 영화에서는 술자리가 그 역할을 반복적으로 수행합니다.

재훈이 전날 밤 모르는 번호로 두 시간 동안 통화한 기록을 발견하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상대는 신입 직원 선영(공효진 분)이었고, 두 사람은 이미 술기운 속에서 서로의 가장 민낯인 연애사를 공유해버린 뒤였습니다. 낮에는 사수와 부사수로 어색하게 마주하고, 밤에는 취기를 빌려 서로에게 솔직해지는 이 구조가 영화 내내 반복됩니다.

"사랑은 믿는 게 아니다"라고 냉소하는 선영과 "그래도 사랑은 진실한 것"이라 믿고 싶은 재훈. 이 두 가지 연애관이 충돌하는 술자리 장면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시퀀스입니다. 취기 속 플러팅이 낭만적으로 보이면서도, 저는 영화를 보는 내내 "술 깨고 나면 현타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불편함이 오히려 이 영화를 현실감 있게 만드는 요소라고 봅니다.

두 사람의 로맨스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들을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1. 공통된 이별 트라우마: 파혼(재훈)과 배신(선영)이라는 비슷한 상처가 동류 의식을 만든다
  2. 술이라는 서사 촉매: 낮의 방어막이 밤의 솔직함으로 전환되는 반복 구조
  3. 직장이라는 공간적 제약: 감정을 숨겨야 하는 환경이 오히려 긴장감을 높인다
  4. 서로 다른 연애관의 충돌: 냉소와 낙관이 부딪히며 변화를 이끌어낸다

연구에 따르면 공통된 부정적 경험을 나눈 사람들 사이에서 친밀감이 형성되는 속도가 일반적인 긍정 경험 공유보다 빠른 경향이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출처: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APA). 재훈과 선영의 관계가 이토록 빠르게 가까워지는 것이 설정 과잉처럼 보이지 않는 이유가 여기 있을지도 모릅니다.

직장 뒷담화 장면이 진짜 불편한 이유

영화의 결정적 전환점은 로맨스가 아니라 직장 내 뒷담화입니다. 회사 동료가 실수로 선영이 포함된 단체 채팅방에 악의적인 험담을 올리면서 선영은 실시간으로 자신을 향한 비난을 목격하게 됩니다. 이 장면을 보면서 저는 영화적 과장이라고 넘기기가 어려웠습니다. 직장 생활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그 특유의 불쾌함이 화면에서 그대로 느껴졌거든요.

직장 내 이런 행위는 법적으로 직장 내 괴롭힘(Workplace Harassment)에 해당할 수 있습니다. 직장 내 괴롭힘이란 사용자나 동료가 지위 또는 관계의 우위를 이용해 업무상 적정 범위를 넘어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는 행위를 말하며, 한국에서는 2019년 개정된 근로기준법에 의해 금지 규정이 마련되어 있습니다(출처: 고용노동부). 영화가 개봉된 2019년은 공교롭게도 이 법 개정이 시행된 해이기도 합니다.

선영이 선택한 복수 방식도 인상적입니다. 그녀는 무너지는 대신 송별회 자리에 예고 없이 등장해, 서로가 주고받은 뒷담화를 그 자리에서 낱낱이 공개합니다. 이 장면에서 카타르시스(catharsis)를 느끼는 관객이 많은 이유가 분명히 있습니다. 카타르시스란 억압된 감정이 극적인 경험을 통해 해소되는 심리적 정화 현상을 뜻합니다. 선영의 폭로는 그녀 개인의 복수이기도 하지만, 직장에서 비슷한 경험을 해본 관객들의 억눌린 감정을 대리 해소해주는 장치이기도 합니다.

이 과정을 지켜본 재훈 역시 변화합니다. 선영의 용기에 자극받아 줄곧 자신을 붙잡아두던 전 여자친구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냅니다. 저는 이 지점이 영화에서 가장 잘 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로맨스 영화에서 흔히 보이는 "상대방이 나를 완성시켜준다"는 의존적 서사 대신, 두 사람이 각자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면서 함께 성장하는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이별 후 성장이라는 미시서사(micro-narrative), 즉 큰 사건 없이 일상 속 작은 변화들이 쌓여 인물이 달라지는 서사 구조가 가장 보통의 연애의 진짜 미덕이라고 봅니다.

결말에서 두 사람은 처음 단둘이 술을 마셨던 그 자리에서 다시 만납니다. 선영이 입 모양으로 "보고 싶었어"라고 말하는 마지막 장면은, 화려하지 않아서 오히려 오래 남습니다. 파혼과 배신이라는 상처를 연민으로 봉합한 설정이 완전히 납득되지는 않았지만, 소주 한 잔 목구멍으로 탁 넘기듯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영화였습니다. 이별의 아픔을 겪어봤다면, 그리고 그 뒤를 술과 후회로 채워본 적이 있다면, 한 번쯤은 볼 만한 영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