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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멘탈 리뷰 (페미니즘 시선, 웨이드 캐릭터, 이민자 서사)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이런 게 사랑이지"라고 혼자 흐뭇하게 중얼거렸습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난 뒤 문득 다시 떠올리다가, 뭔가 이상하다 싶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픽사의 2023년작 엘리멘탈(Elemental)을 처음 봤을 때 저도 그냥 예쁜 사랑 이야기로만 받아들였거든요. 그런데 다시 뜯어보니 이 영화, 마냥 기분 좋게 볼 수만은 없더라고요.

페미니즘 시선으로 다시 본 앰버 이야기

솔직히 처음에는 전혀 신경 쓰지 못했습니다. 앰버가 주체적으로 뭔가를 해내는 캐릭터라고 철석같이 믿고 봤으니까요. 그런데 페미니즘 관련 책을 꽤 읽어온 제가 이 영화를 보며 그냥 "아 러브스토리 좋다"로 끝냈다는 사실이 나중에 꽤 부끄럽게 느껴졌습니다.

앰버는 이주민 부모가 가난하게 꾸려온 가게를 물려받는 것이 삶의 유일한 목표였습니다. 돈이 없어서 수도 시설도 아버지가 직접 만들었을 만큼, 가진 것이 없는 집안입니다. 늘 가시가 돋아있고, 분노를 잘 참지 못하며, 외부 세계와 단절된 채로 살아왔죠. 그 배경 자체는 충분히 공감 가는 서사입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앰버는 결국 백마 탄 왕자님처럼 등장한 웨이드를 만나고, 그를 통해 넓은 세상을 보게 됩니다. 새로운 경험을 제공한 것도, 기회를 먼저 손 내민 것도 전부 웨이드 쪽입니다. 영화 내내 앰버가 스스로 일궈낸 것이 뭔지 생각해보면, 솔직히 딱히 떠오르는 게 없습니다. 분노도 끝까지 잘 못 다스리고, 자기 마음을 표현하는 것도 마지막까지 쩔쩔맵니다.

수동적 여성 서사(Passive Female Narrative)란 여성 캐릭터가 스스로의 힘으로 성장하거나 선택하지 않고, 타인의 개입에 의해 변화되는 구조를 뜻합니다. 엘리멘탈의 앰버는 안타깝게도 이 구조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합니다.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살다가, 웨이드와의 연애로 삶의 방향이 바뀌는 흐름. 21세기 극장에서 보게 될 서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이 점을 더 아프게 느낀 건, 이 영화가 노골적으로 그 서사를 드러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영상과 따뜻한 감정선으로 포장되어 있으니까, 비판적으로 보지 않으면 그냥 흘러가 버립니다. 저처럼요.

미디어 재현(Media Representation)이란 영화나 드라마 등 대중 미디어가 특정 집단이나 성별을 어떤 방식으로 묘사하느냐를 뜻합니다. 픽사처럼 전 세계 어린이들이 보는 스튜디오가 만든 작품에서 여성 캐릭터가 어떻게 그려지느냐는 단순한 취향의 문제가 아닙니다. 실제로 출처: Geena Davis Institute on Gender in Media의 연구에 따르면, 어린 시절 자주 접하는 미디어 속 여성 캐릭터의 자율성과 능동성 수준이 아이들의 성 고정관념 형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영화를 마냥 귀엽다고만 볼 수 없었습니다.

웨이드 캐릭터가 유독 좋았던 이유

그래도 솔직하게 말하면,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꽤 많이 설렜습니다. 그 이유가 전적으로 웨이드 때문이었다고 지금도 생각합니다.

제 블로그를 오래 읽어온 분들은 아시겠지만, 저는 소위 너드남이나 찐따미 넘치는 캐릭터에 약합니다. 웨이드는 그 두 가지를 다 갖추고 있었습니다. 첫 데이트에서 앰버가 나타났다는 이유만으로 펑펑 울어버리는 장면은, 처음 봤을 때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 남자 뭐야" 하고요.

웨이드가 특별했던 건 단순히 감수성이 풍부해서가 아닙니다. 그는 타인의 감정에 진심으로 반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남이 슬프면 같이 울고, 아름다운 것을 보면 진짜로 감동받는 그 태도가 영화 내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저도 최근에야 감탄을 잘 하고 감동을 쉽게 받는 사람이 주변까지 기분 좋게 만든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그러면서 저 스스로도 그런 방향으로 변해가려고 노력 중인데, 웨이드를 보면서 그게 더 구체적으로 느껴졌습니다.

감정 표현 능력(Emotional Expressiveness)이란 자신의 내면 상태를 언어나 행동으로 솔직하게 드러내는 능력을 말합니다. 심리학 연구들에 따르면 이 능력이 높은 사람일수록 대인 관계 만족도가 높고 갈등 해소 능력도 뛰어난 경향이 있습니다. 웨이드는 그 능력이 극도로 발달한 캐릭터였고, 그래서 오히려 현실적인 매력으로 느껴졌습니다.

웨이드의 가족들이 다들 다정하다는 것도 인상 깊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자라날 수 있는 환경이 있었기에 그런 남자가 됐을 거라는 생각, 영화를 보면서 제가 직접 느낀 부분입니다. 상남자 코드니 차가운 츤데레니 하는 캐릭터들과 비교했을 때, 웨이드처럼 잘 울고 잘 감동받고 표현을 잘 하는 쪽이 저는 훨씬 좋습니다. 이건 대단히 개인적인 기준이지만요.

영화 엔딩에서 웨이드가 스펀지에 트라우마가 생기는 장면은 예상치 못한 웃음 포인트였습니다. 그 장면 하나로 웨이드라는 캐릭터의 일관성이 마지막까지 유지됐다고 느꼈습니다. 억지로 강해지거나 멋있어지려 하지 않고, 끝까지 자기 자신인 캐릭터. 그게 결국 가장 매력적이었습니다.

이민자 서사가 만든 진짜 감동의 층위

페미니즘 비판과는 별개로, 이 영화가 담고 있는 이민자 서사(Immigrant Narrative)만큼은 진심으로 좋았습니다. 이민자 서사란 고국을 떠나 새로운 사회에 정착하려는 사람들의 경험과 정체성 갈등을 다루는 이야기 구조를 말합니다.

앰버의 아버지가 파이어 타운에 자리를 잡기까지의 과정을 보면, 단순한 배경 설정이 아니라 감독 피터 손의 실제 경험이 녹아들어 있다는 게 느껴집니다. 피터 손 감독은 한국계 이민자 가정에서 자란 경험을 이 영화에 직접 투영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불 종족이 다른 원소들에게 핍박을 받고, 닿기만 해도 모든 것을 태워버릴 수 있다는 이유로 사회적 장치 하나 마련되지 않은 채 살아가야 하는 설정은, 현실의 이민자 차별 구조와 꽤 정확하게 겹칩니다.

사회적 통합(Social Integration)이란 소수 집단이 주류 사회의 문화적, 제도적 구조 안으로 편입되는 과정을 뜻합니다. 엘리멘탈의 엘리멘트 시티는 물, 바람, 흙을 위한 공간은 충분히 마련되어 있지만, 불을 위한 시설은 거의 없습니다. 이 설정이 단순한 세계관 구성이 아니라 사회 구조에 대한 비판적 시선이라는 걸, 저는 두 번째로 볼 때야 제대로 읽을 수 있었습니다.

엔딩에서 앰버가 아버지 아쉬파에게 큰절을 올리는 장면은, 제가 직접 겪어보지 않아도 뭔가 울컥하는 감정이 올라오는 장면이었습니다. 언어가 달라도, 문화가 달라도, 부모의 헌신에 보답하고 싶다는 마음은 다 같다는 걸 그 한 장면이 말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이 부분에서는 페미니즘 비판보다 훨씬 앞서 감동이 먼저 왔습니다.

엘리멘탈이 담고 있는 이민자 가정의 감정선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1. 부모 세대가 새로운 사회에서 차별과 배제를 견디며 가게 하나를 일궈내는 과정
  2. 그 가게를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이 자녀 세대의 꿈을 눌러버리는 갈등 구조
  3.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찾는 과정에서 부모의 희생과 충돌하게 되는 감정
  4. 결국 부모가 먼저 손 내밀어 자녀의 선택을 수용하는 세대 간의 화해

이 네 가지 흐름은 영화 속에서 굉장히 조용하게, 그러나 선명하게 그려집니다. 저는 이 부분이 엘리멘탈의 진짜 심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영화를 한 번 보고 끝내는 것과, 한 번 더 들여다보는 것은 전혀 다른 경험이었습니다. 앰버의 서사에서 아쉬움을 느끼면서도, 이민자 가족 이야기와 웨이드라는 캐릭터가 주는 감동은 여전히 유효했습니다. 엘리멘탈이 좋았다면, 한 번쯤 페미니즘 시선으로도 다시 떠올려 보시길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