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부터 이영화를 "그냥 예쁜 신데렐라 이야기겠지" 하고 무시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처음 봤을 때, 원작 결말이 따로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고, 알고 나서는 꽤 오랫동안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1990년 개봉한 <귀여운 여인>은 지금 봐도 충분히 재미있지만, 그 뒤에 숨겨진 맥락까지 알면 훨씬 다른 영화로 보입니다.
원작 결말이 이렇게 달랐다고요
제가 처음 이 영화의 초안 제목이 '3,000'이었다는 걸 알게 됐을 때, 솔직히 좀 충격이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해피엔딩과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였으니까요. 각본가 J.F. 로턴이 처음 쓴 버전에서는 에드워드가 비비안에게 3천 달러를 쥐어주고 그냥 떠나버립니다. 비비안은 그 돈을 던지지만 결국 다시 줍고, 버스 안에서 친구 키트에게 디즈니랜드에 데려다 주겠다며 씁쓸하게 끝납니다.
로턴이 이 이야기를 쓴 배경을 알면 그 암울한 결말이 납득이 됩니다. 그는 1980년대 헐리우드 대로 근처에 살면서 24시간 커피숍을 드나들던 매춘 여성들과 자연스럽게 친구가 됐고, 그들의 실제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에드워드라는 캐릭터도 당시 미국에서 성행하던 적대적 기업 인수합병(M&A, Mergers and Acquisitions)을 상징하는 인물로 설정했습니다. 적대적 기업 인수합병이란 대상 기업의 동의 없이 경영권을 빼앗는 방식으로, 수많은 직원과 가정을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구조입니다. 로턴은 그런 가해자와 그 피해자가 만나는 구도로 사회 비판적 서사를 쓰고 싶었던 겁니다.
그러다 판권이 브에나비스타(디즈니)로 넘어가고 게리 마샬 감독이 각본을 다듬으면서 영화의 결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줄리아 로버츠도 처음에는 암울한 결말 때문에 출연을 망설였다고 하니, 지금 우리가 아는 이 영화는 사실 여러 번의 각색(adaptation)을 거친 결과물입니다. 각색이란 원작의 내용과 주제를 다른 형식이나 분위기에 맞게 바꾸는 작업을 뜻합니다. 출연 배우들 중 일부는 촬영 내내 비비안이 약물 과다복용으로 죽는 결말인 줄 알고 있었다고 하니, 그 혼선이 얼마나 심했는지 짐작이 갑니다.
신데렐라 서사가 왜 비판을 받는가
제가 이 영화를 본 뒤 가장 오래 붙잡고 있었던 질문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이게 로맨틱한 건가, 아니면 문제가 있는 건가." 페미니스트 영화 비평 쪽에서 이 영화에 비판적인 이유는 단순히 "여자가 부자 남자 만나서 성공한다"는 공식 때문만이 아닙니다. 비비안이라는 캐릭터가 처한 현실이 영화 안에서 지나치게 낭만화(romanticization)되어 있다는 지적입니다. 낭만화란 실제보다 훨씬 아름답고 매력적으로 포장하여 현실의 문제를 가리는 표현 방식을 뜻합니다.
실제 통계를 보면 이 낭만화가 얼마나 심각한지 드러납니다. 미국에서 길거리 성매매를 시작하는 평균 나이는 12~14세이며, 그 중 70% 이상이 고객으로부터 폭력을 경험합니다. 성매매를 하지 않는 여성과 비교했을 때 범죄 피해로 사망할 확률은 40배나 높고, 성매매가 불법인 지역에서는 피해를 당해도 신고조차 하기 어렵습니다. 세계보건기구(WHO) 자료에서도 성매매 여성이 겪는 신체적, 정신적 폭력 노출 위험이 일반 여성에 비해 현저히 높다는 점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영화 속 비비안은 그런 위험과 거의 무관하게 그려집니다. 고급 호텔에서 지내고, 로데오 거리에서 쇼핑하고, 오페라 공연장에서 눈물을 흘립니다. 이 장면들이 아름다운 건 사실이지만, 동시에 현실과는 한참 거리가 있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류의 영화는 볼 때는 기분이 좋고 보고 나서는 묘하게 찜찜한 감각이 남는데, 그 이유가 이 낭만화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전혀 가치가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에드워드가 비비안의 존엄성을 점차 인정하고, 기업을 해체하는 방식 대신 협력하는 방식으로 전환하는 서사는 나름의 울림이 있습니다. 다만 그 변화를 "사랑이 남자를 바꾼다"는 공식으로만 소비하게 만드는 구조는 분명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이 영화가 비판을 받으면서도 흥행한 요인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줄리아 로버츠의 캐릭터 소화력이 비비안이 가진 현실적 취약성을 상쇄할 만큼 강했습니다.
- 로이 오비슨의 주제가와 함께 흐르는 쇼핑 장면이 30년이 지난 지금도 수없이 오마주될 만큼 강렬한 시각적 인상을 남겼습니다.
- 원작의 사회 비판적 맥락이 삭제되면서 관객이 편안하게 감정 몰입을 할 수 있는 구조로 재편됐습니다.
- 멕 라이언이 출연을 거절한 덕분에 당시 무명이었던 줄리아 로버츠가 캐스팅됐고, 이것이 오히려 영화에 신선함을 더했습니다.
줄리아 로버츠가 없었다면 이 영화는 존재했을까
제작진은 처음부터 리처드 기어를 에드워드 역으로 점찍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초안 단계의 에드워드는 지금과 달리 인성이 상당히 불쾌한 캐릭터였고, 리처드 기어는 완강히 거절했습니다. 각본이 수정되고 에드워드가 로맨틱한 인물로 변모한 뒤에야 출연을 결정했다고 하니, 이 영화는 배우가 캐릭터를 바꾼 사례이기도 합니다.
캐릭터 아크(character arc)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이는 영화 안에서 인물이 처음과 끝에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보여주는 심리적 성장 곡선을 뜻합니다. 에드워드의 캐릭터 아크는 비비안을 만나기 전과 후가 꽤 뚜렷하게 구분됩니다. 기업을 해체해서 이익을 취하던 방식을 반성하고, 모스 기업 창업주와 협력하는 쪽으로 방향을 튼다는 설정이 그것입니다. 비록 이 변화가 영화 안에서 충분히 설득력 있게 묘사됐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리지만요.
줄리아 로버츠의 미장센(mise-en-scène) 활용도 이 영화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미장센이란 화면 안에 배치되는 인물, 소품, 조명, 색채 등 모든 시각 요소의 총합을 뜻합니다. 비비안의 의상이 장면마다 극적으로 달라지도록 설계된 것이 바로 이 미장센 전략의 핵심이었고, 특히 흰 땡땡이 무늬 적갈색 드레스는 원단을 구하기 위해 공장 지하창고까지 뒤졌다고 하니 그 공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제63회 아카데미 시상식(The Academy of Motion Picture Arts and Sciences)에서 줄리아 로버츠가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것도 이 모든 요소가 어우러진 연기의 완성도 덕분이었습니다.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오페라 극장 시퀀스였습니다.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를 처음 보는 비비안이 눈물을 흘리는 그 순간, 에드워드가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이 변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장면 하나로 두 사람 사이의 감정 변화를 설명하는 방식이, 긴 대사보다 훨씬 효과적으로 작동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귀여운 여인>은 단순히 예쁜 로맨스로 소비해도 좋고, 각색 과정과 사회적 맥락을 따라가며 봐도 꽤 복잡한 층위를 가진 영화입니다. 처음 봤을 때 그냥 넘어갔던 부분들이 원작 결말을 알고 나면 다르게 보입니다. 만약 아직 이 영화를 안 보셨다면, 한 번은 가볍게, 두 번째는 이 뒷이야기를 머릿속에 넣고 보시길 권합니다. 같은 장면이 전혀 다르게 읽힐 겁니다.
--- 참고: https://blog.naver.com/wjdwjd555/2231434528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