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로 나가는 게 아니라 지구 속으로 들어간다는 설정 하나만으로 뭔가 달라 보였습니다. 2003년 개봉한 존 아밀 감독의 <코어>는 지구의 외핵 회전이 멈추면서 벌어지는 대재난을 다룬 SF 재난영화로, 저는 거실 불을 끄고 사운드 볼륨을 잔뜩 올린 채 혼자 봤다가 클라이맥스에서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걸 느꼈습니다.
사건 먼저, 설명은 나중에 — 이 전개방식이 통했다
혹시 영화를 틀자마자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지?" 싶었던 경험 있으신가요? <코어>는 캐릭터 소개도, 배경 설명도 없이 곧바로 이상 징후를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심장박동 조율기(pacemaker, 심장 리듬을 인위적으로 조절하는 의료기기)를 달고 있던 보스턴 시민들이 동시에 쓰러지고, 새 떼가 도시를 덮치는 장면들이 설명 한 마디 없이 이어집니다. 이런 전개방식을 영화 비평 용어로 인 메디아스 레스(In medias res)라고 부릅니다. 라틴어에서 온 표현으로, '사건의 한복판에서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이 방식이 왜 효과적이냐면, 관객이 스스로 상황을 파악하려는 능동적 태도를 취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저도 처음엔 영문도 모르고 화면에 집중하다가, 어느 순간 '이건 지구 자체의 문제구나'라는 걸 깨달았을 때 오히려 더 크게 빠져들었습니다. 캐릭터 소개는 팀이 꾸려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이뤄지는데, 각 분야 전문가를 한 명씩 영입하는 장면이 꼭 어벤져스 팀업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지질물리학자(geophysicist, 지구 내부 구조와 물리적 특성을 연구하는 전문가) 조슈아 키스(아론 에크하트)를 중심으로, 항공 소령 레베카 차일스(힐러리 스웽크), 탐사선 설계자 브래즐톤 박사(델로이 린도) 등 여섯 명의 팀이 꾸려지는 과정이 꽤 속도감 있게 진행됩니다. 준비 장면도, 실제 지구 내부로 진입하는 장면도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이어지는데, 이 부분은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완성도가 높았습니다.
과학고증 논란,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코어>는 개봉 당시부터 과학적 오류 지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영화 속 설정 중 상당 부분은 현실의 지구과학과 거리가 있습니다. 외핵(outer core)이란 지표면에서 약 2,900킬로미터 깊이에 위치한 액체 상태의 철-니켈 혼합층을 말합니다. 이 외핵의 대류 운동이 지구 자기장(geomagnetic field)을 만들어내는데, 자기장이란 지구가 태양풍과 우주 방사선을 막아주는 보이지 않는 방패 같은 것입니다. 영화는 이 외핵의 회전이 멈추면서 자기장이 붕괴한다는 설정을 씁니다.
실제 과학적으로 보면 외핵이 '갑자기 회전을 멈춘다'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미국 지질조사국(USGS)의 지자기 연구 자료에 따르면, 지구 자기장은 수십만 년 주기로 서서히 역전되거나 약화될 수는 있어도 단기간에 갑작스럽게 소멸하지는 않습니다. 과학을 엄밀하게 따지자면 이 영화는 분명히 허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지적이 좀 아쉽습니다. 영화라는 장르는 인간이 직접 경험할 수 없는 영역을 간접 체험하게 해주는 예술입니다. 과학 논문을 읽으러 극장에 가는 사람은 없잖아요. 과학적 엄밀함을 기준으로 보는 분들도 계시지만, 저는 이 영화를 오락 장르로 접근하니까 불편함보다 재미가 훨씬 컸습니다. 실제로 영화 속 재난 시퀀스들 — 금문교 붕괴, 로마 고대 유적의 파괴 장면 — 은 스케일 면에서 볼거리가 충분했습니다.
지구내부를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니
이 영화에서 제가 가장 놀랐던 부분은 사실 지구 내부를 시각화한 방식입니다. 우주 배경의 SF영화는 아름다운 성운이나 행성 표면을 보여주며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그런데 지구 내부는 빛도 없고, 기준점도 없는 공간입니다. 어떻게 표현하냐에 따라 그냥 어두운 동굴 수준으로 끝날 수도 있었는데, 이 영화는 달랐습니다.
특히 거대한 수정 동굴 시퀀스는 지금 봐도 인상적입니다. 압전 결정(piezoelectric crystal, 압력을 받으면 전기를 발생시키는 결정 구조 광물)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동굴이 탐사선 불빛을 받아 빛나는 장면은, 마치 2018년 개봉한 <앤트맨과 와스프>에 등장하는 양자 영역처럼 신비롭고 낯선 느낌을 줍니다. 현실에 없는 공간을 표현하면서도 완전히 낯설지는 않은 온도를 유지한 것이, 이 영화의 미술 연출이 가진 강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탐사선 '버질(Virgil)'의 외관 디자인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초고온과 초고압을 견디는 탐사선의 소재로 영화 속에서 '우노브타늄(Unobtainium)'이라는 가상의 신소재가 등장하는데, 이 소재는 압력이 강해질수록 오히려 더 단단해진다는 설정입니다. 나중에 <아바타>(2009)에도 같은 이름이 등장해서 혼자 피식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2003년 당시로선 꽤 세심하게 설정을 만든 쪽에 속합니다.
이 영화에서 지구 내부 묘사가 관객에게 효과적으로 전달된 이유를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 압전 결정 동굴처럼 실제 광물 과학을 응용한 공간 설계로 완전한 허구가 아닌 느낌을 줬습니다.
- 탐사선 내부의 좁고 밀폐된 공간을 활용해 위기감과 긴장감을 증폭시켰습니다.
- 각 지층을 통과할 때마다 온도와 압력이 달라지는 상황을 수치로 제시해 몰입감을 높였습니다.
- 웅장한 오케스트라 음악이 시각적 연출과 맞물려 정서적 몰입을 유도했습니다.
희생과 반전, 이 서사가 영화를 살렸다
단순히 지구를 구하러 간다는 미션 자체만으로는 2시간을 채우기 어렵습니다. <코어>가 그 공백을 메우는 방식이 꽤 영리했습니다. 팀원들이 하나씩 목숨을 내놓으며 임무를 이어가는 구조인데, 이걸 억지스럽지 않게 처리한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구의 핵이 멈춘 이유에 비밀이 숨어 있다는 반전 설정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미 정부가 과거에 지하 핵 진동 무기 실험을 진행했고, 그 여파로 외핵 회전이 교란되었다는 것인데, 이 설정 덕분에 영화에 약간의 정치적 긴장감까지 생겼습니다. 야심 많은 군 관계자와 희생을 감수하는 과학자들 사이의 대립 구도가 서사에 결을 더해준 셈입니다.
마지막 클라이맥스에서 충격파 에너지를 이용해 탐사선을 해저에서 부상시키는 장면은,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구조 신호를 음파로 전달하는 고래의 도움을 받는 설정까지 더해지면서, 무겁게만 흘렀던 긴장감이 순간적으로 풀리는 느낌이었습니다. 억지 감동을 억지로 쥐어짜지 않았다는 게 좋았습니다. IMDb의 <코어> 정보 페이지에서도 이 작품이 개봉 당시 엇갈린 평가를 받았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지금 다시 보면 그 혹평이 조금 가혹했다는 생각도 듭니다.
결국 <코어>는 과학 교재가 아닌 오락 영화로서 충분한 역할을 한 작품이라고 저는 봅니다. 지구 내부라는 낯선 공간에 대한 상상력, 팀원들의 희생으로 이어가는 서사 구조, 그리고 사건 먼저 보여주고 설명은 나중에 하는 전개방식까지. 이 세 가지만으로도 2시간이 지루하지 않습니다. SF 재난 장르를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우주로 나가는 영화에서 잠시 방향을 바꿔 지구 속으로 들어가는 이 영화를 한번 꺼내 보시길 권합니다. 거실 불은 꺼두는 게 훨씬 낫습니다.
--- 참고: https://blog.naver.com/glass_movie/2230609039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