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이 지난 지금도 손에 땀이 맺히더군요. 2009년 개봉한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의 영화 2012, 지구 종말이라는 압도적 스케일을 인간 이야기로 단단히 묶어낸 재난 영화의 기준점 같은 작품입니다.
네이버 평점 7.6, 저는 왜 8.5를 줬을까
네이버 영화 기준 평점이 7.6이라는 수치를 보고 솔직히 조금 당황했습니다. 제가 이 영화에 매기는 점수는 개인적으로 8.5/10.0이거든요. 그 차이가 어디서 오는지 한번 따져봤습니다.
흥행 성적을 먼저 보면 이 영화는 제작비 약 2억 달러를 투입해 전 세계 박스오피스에서 7억 9천만 달러 이상을 거뒀습니다. 투자 대비 수익률만 따지면 확실히 성공한 작품입니다. 그런데 평론가 집계 사이트인 로튼 토마토(Rotten Tomatoes)에서는 신선도 지수(Tomatometer), 즉 평론가 평가 비율이 39%에 그칩니다. 신선도 지수란 해당 작품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공인 평론가의 비율을 백분율로 나타낸 수치인데, 이 숫자가 낮다는 건 전문 비평 쪽에서는 냉담했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어느 정도 짐작이 됩니다. 영화 2012는 미장센(mise-en-scène), 즉 화면 안에 배치된 모든 시각 요소들이 어떻게 의미를 만들어내는지에 집중하는 작가주의적 연출보다는, 관객을 극장 좌석 끝에 아슬아슬하게 세워놓는 엔터테인먼트 효율에 훨씬 더 집중한 작품입니다. 이 지점이 평론가들에게 "깊이가 얕다"는 평가를 낳은 것으로 보입니다. 반면 저처럼 재난 영화 특유의 몰입감과 탈출 서사를 좋아하는 관객에게는 오히려 그 직관성이 강점으로 작동합니다.
실제로 제 경험상 이 장르에서 "의미 있는 영화"와 "재밌는 영화"를 동일시하면 오산입니다. 영화 2012는 처음부터 끝까지 관객을 쉬게 내버려 두지 않는 페이싱(pacing), 그러니까 장면 전환과 긴장감 유지 속도 면에서 재난 영화 역사상 최고 수준에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출연진이 이 영화를 어떻게 만들었나
영화 2012의 주연진은 존 쿠삭, 아만다 피트, 치웨텔 에지오포, 탠디 뉴튼, 올리버 플랫입니다. 제가 이 영화를 다시 봤을 때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치웨텔 에지오포와 탠디 뉴튼이 지금도 왕성하게 활동 중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보니 연기가 훨씬 다르게 느껴졌다는 점입니다. 당시엔 몰랐는데, 이 배우들이 이후 어떤 커리어를 쌓는지 알고 나서 다시 보니 "아, 그때부터 이미 달랐구나" 싶었습니다.
특히 치웨텔 에지오포가 연기한 과학자 아드리안 헬름슬리는 캐릭터 아크(character arc), 즉 인물이 이야기 안에서 겪는 내면의 변화와 성장 과정이 가장 선명하게 그려진 인물입니다. 캐릭터 아크란 주인공이나 주요 인물이 사건을 거치면서 어떻게 변하는지를 설계한 서사 구조를 말하는데, 에지오포는 이 설계를 단순한 대사 이상으로 몸 전체로 표현했습니다.
조연 중에서는 우디 해럴슨이 맡은 라디오 BJ 캐릭터가 단연 눈에 띕니다. 지금의 우디 해럴슨이 무게감 있는 역할을 주로 맡는 걸 생각하면, 이 영화에서의 코믹하고 살짝 기이한 캐릭터는 상당한 반전입니다. 제 경험상 이런 배우들의 초기작이나 이색 출연작을 발굴해서 보는 재미가 영화를 오래 즐기는 방법 중 하나인데, 영화 2012가 딱 그런 케이스였습니다.
배급사는 소니 픽처스로, 소니의 자회사입니다. 대형 스튜디오가 뒤를 받쳐준 덕에 이 정도 스케일의 프로덕션(production), 즉 실제 촬영과 CG 작업을 포함한 제작 전 과정이 가능했을 것입니다.
재난 연출의 문법, 어디서 차이가 나는가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은 인디펜던스 데이(1996), 투모로우(2004), 그리고 이 영화까지 일종의 재난 3부작을 완성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직접 세 편을 비교해서 봤는데, 영화 2012가 다른 두 편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재난의 규모가 "지역"이 아니라 "지구 전체"라는 데 있습니다. 인디펜던스 데이는 외계 침공, 투모로우는 기후 재앙이었지만, 영화 2012는 지각판 자체가 움직이는 플레이트 텍토닉스(plate tectonics) 붕괴를 다룹니다. 플레이트 텍토닉스란 지구 표면을 이루는 여러 개의 지각 판이 서로 충돌하고 이동하는 현상을 설명하는 이론으로, 이것이 극단적으로 가속화될 경우 지진, 화산 폭발, 쓰나미가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합니다. 영화는 이 이론을 시각화하는 데 당시 기준으로 최고 수준의 시각효과(VFX, Visual Effects)를 투입했습니다.
VFX란 디지털 기술로 실제 촬영 장면에 가상의 이미지를 합성하거나 현실적으로 구현하기 어려운 장면을 만들어내는 기술입니다. LA 전체가 가라앉는 장면, 옐로스톤 국립공원의 화산 폭발 시퀀스, 히말라야를 넘어서는 쓰나미 장면은 이 기술의 정점을 보여줬습니다. 놀라운 건 지금 봐도 이 장면들이 어색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2009년 작품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완성도가 높습니다.
서사 구조 측면에서도 이 영화는 단순한 탈출극이 아닙니다. 아래는 영화 2012가 재난 영화 문법 안에서 어떤 요소들을 설계했는지 정리한 것입니다.
- 플레이트 텍토닉스 붕괴라는 과학적 근거를 설정의 출발점으로 삼아 개연성을 확보했습니다.
- 마야 문명의 종말론을 이야기 진입 장치로 활용해 당시 시대적 관심을 흡수했습니다.
- 이혼 가족의 화해라는 개인 서사와 인류 생존이라는 거시 서사를 병렬로 진행시켜 감정 이입을 유도했습니다.
- 방주(Ark)라는 현대판 노아의 방주 설정으로 도덕적 갈등 구조, 즉 누가 살아남을 자격을 결정하는가라는 질문을 영화 내내 유지했습니다.
이 네 가지 레이어가 한꺼번에 작동하면서 단순한 폭발 장면 나열 이상의 영화가 됩니다. 마야 종말론이 2012년을 기점으로 급속도로 관심이 식었음에도 이 영화가 지금도 넷플릭스 인기 콘텐츠 목록에 자주 오르는 이유가 여기 있다고 봅니다. IMDb(인터넷 영화 데이터베이스)에서도 영화 2012의 평균 평점은 6.0/10이지만 평가 참여자 수가 30만 명을 넘어, 꾸준히 회자되는 작품임을 수치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금 다시 봐야 할 이유, 데이터로 따져보면
넷플릭스에서 꾸준히 상위권에 재등장하는 영화들을 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스트리밍 알고리즘이 선호하는 완주율(completion rate), 즉 시청을 시작한 사람이 끝까지 보는 비율이 높다는 점입니다. 완주율이란 콘텐츠의 실질적 흡입력을 나타내는 지표로, 이 수치가 높을수록 알고리즘이 더 많은 사람에게 추천합니다. 영화 2012는 154분이라는 긴 러닝타임에도 완주율이 높은 편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건 이 영화가 중반 이후 페이싱을 절대 놓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직접 다시 봤을 때도 그 점이 확실히 느껴졌습니다. 보통 재난 영화는 클라이맥스 이후 힘이 빠지는데, 영화 2012는 방주의 해치가 열리는 마지막 30분까지 긴장감을 유지합니다. 치웨텔 에지오포가 세계 정상들을 설득하는 장면과 존 쿠삭이 수중에서 기어 고장을 수리하는 장면이 교차 편집(cross-cutting), 즉 두 개의 서로 다른 공간에서 동시에 진행되는 장면을 번갈아 보여주는 편집 기법을 통해 극도의 긴장감을 끌어올립니다. 이 기법 덕분에 관객은 두 공간의 결말을 동시에 기다리게 됩니다.
하랄트 클로저가 작곡한 음악도 이 긴장감에 정확하게 맞물립니다. 오케스트라 스코어(orchestra score), 즉 영화의 장면 전개에 맞춰 작곡된 관현악 음악이 위기 장면마다 감정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저는 영화를 볼 때 음악에 그다지 집중하는 편이 아닌데,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음악이 귀에 들어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