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시간 30분짜리 재난 블록버스터라니, 중간에 졸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여겼거든요. 그런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저는 소파에 앉아 말없이 한참을 멍하니 있었습니다. 1998년작 아마겟돈(Armageddon)이 제게 남긴 여운은 그 정도였습니다.
텍사스 크기 소행성이 던진 질문, 당신은 무엇을 위해 희생할 수 있습니까
영화의 설정 자체는 단순합니다. 텍사스주만 한 크기의 소행성이 시속 4만 킬로미터로 지구를 향해 돌진하고, 충돌까지 남은 시간은 단 18일. 미국항공우주국(NASA)이 내놓은 해결책은 소행성 표면에 구멍을 뚫고 핵폭탄을 매설해 두 조각으로 쪼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황당한 계획을 수행할 적임자로 낙점된 사람이 우주비행사도 과학자도 아닌, 평생 땅 속 기름만 파온 석유 시추 전문가 해리 스탬퍼(브루스 윌리스 분)입니다.
저는 이 설정이 처음에는 좀 억지스럽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이 터무니없는 선택이야말로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장치였습니다. 영웅은 훈련된 엘리트가 아니라, 가장 평범하고 거친 곳에서 온다는 메시지 말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개념이 있습니다. 영화 비평에서 자주 쓰이는 현실 개연성(Verisimilitude)이라는 용어입니다. 현실 개연성이란 허구의 이야기 안에서 관객이 "이것은 실제로 일어날 수 있겠다"고 납득하게 만드는 서사적 논리를 뜻합니다. 아마겟돈은 과학적 고증 면에서 이 현실 개연성이 낮다는 비판을 꾸준히 받아왔습니다. 실제로 NASA 소속 과학자들이 이 영화의 과학적 오류를 138가지나 지적했다는 이야기는 꽤 유명하지요.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 오류들을 전부 알고 있어도 영화를 보는 내내 그게 별로 거슬리지 않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마이클 베이표 블록버스터 연출, 계산된 과잉인가 진심인가
마이클 베이 감독의 연출 스타일을 두고 "과잉 연출"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저도 한때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슬로 모션(Slow Motion)이란 실제보다 느리게 재생하여 장면의 극적 효과를 높이는 촬영·편집 기법을 말하는데, 이 영화에는 그 슬로 모션이 넘쳐납니다. 황금빛 노을을 배경으로 걸어오는 우주복 차림의 굴착꾼들, 카메라를 올려다보는 브루스 윌리스의 눈빛, 폭발 직후 뒤돌아보는 장면들.
그런데 거실 조명을 어둡게 낮추고 사운드 시스템을 제대로 켜놓은 상태에서 이 영화를 다시 봤을 때, 저는 솔직히 그 과잉이 오히려 옳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재난 블록버스터(Blockbuster)란 막대한 제작비를 투입해 대규모 관객을 겨냥하는 상업 영화를 일컫는 말인데, 그 장르의 문법 안에서 감정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는 것은 결함이 아니라 선택입니다. 마이클 베이는 그 선택을 가장 과감하게 실행한 감독입니다.
특히 소행성 표면을 달리는 특수 탐사 차량 아르마딜로(Armadillo)의 추격 시퀀스와, 두 우주선이 회전하며 도킹하는 장면은 지금 봐도 박진감이 살아있습니다. 1998년 당시의 시각 효과(Visual Effects) 기술, 즉 컴퓨터 그래픽과 미니어처 세트를 혼합해 시각적 환상을 만드는 기술 수준을 감안하면 이 완성도는 정말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아마겟돈이 그해 전 세계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한 것은 단순한 마케팅의 힘이 아니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래는 이 영화가 90년대 재난 블록버스터 중에서도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는 이유를 정리한 것입니다.
- 주인공이 훈련된 영웅이 아닌 평범한 노동자라는 역발상 설정으로 관객과의 감정적 거리를 좁혔습니다.
- 마이클 베이 특유의 슬로 모션과 광각 렌즈를 활용한 압도적 미장센(Mise-en-scène)이 스크린 밀도를 극대화했습니다.
- 에어로스미스의 주제곡 'I Don't Want to Miss a Thing'이 감정적 클라이맥스와 정확하게 맞물리는 사운드 설계가 탁월했습니다.
- 부성애와 연인 간의 사랑이라는 보편적 감정을 재난의 공포와 교차 편집하여 카타르시스를 극대화했습니다.
브루스 윌리스의 부성애, 그 마지막 교신 장면이 여전히 울리는 이유
이 영화에서 제가 가장 강하게 기억하는 장면은 단연 해리 스탬퍼의 마지막 교신 장면입니다. 제비뽑기로 뽑힌 딸의 연인 AJ 대신 자신이 소행성에 남기로 선택하는 순간, 브루스 윌리스의 얼굴에는 대사보다 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습니다. "너는 내 딸이다. 그것보다 더 자랑스러운 일은 세상에 없단다"라는 대사는 지금도 귓가에 선명하게 남아있습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이 영화를 함께 보여준 적이 있습니다. 그때 그 장면에서 아이들이 조용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어떤 설명도 없이, 화면 속 해리의 눈물만으로 아이들이 무언가를 이해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영화적 카타르시스(Catharsis)란 극적 긴장이 해소될 때 관객이 느끼는 감정적 정화와 해방감을 뜻하는 개념인데, 그 정의를 책에서 읽은 것보다 이 장면 하나에서 더 깊이 이해했다는 것이 제 솔직한 감상입니다.
벤 애플렉과 리브 타일러가 연기한 AJ와 그레이스의 사랑도 이 영화에서 빠질 수 없는 축입니다. 재난의 공포 속에서 더욱 선명해지는 두 사람의 감정선은 영화 전체의 서정적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을 합니다. 특히 리브 타일러가 아버지의 마지막 영상 교신을 받는 장면은 보는 내내 가슴이 먹먹해지는 연기였습니다. 에어로스미스의 스티브 타일러가 딸인 리브 타일러를 위해 이 곡을 불렀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그 장면의 감동은 한 겹 더 깊어집니다.
참고로 영화에서의 핵폭탄 굴착 설정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를 두고 NASA 관련 커뮤니티에서도 오랫동안 논의가 이어졌습니다. 미국 행성과학 연구의 실제 소행성 충돌 대응 계획이 궁금하신 분은 NASA 행성 방어 조정국(PDCO)의 공식 자료를 참고하시면 흥미로운 내용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영화와 현실 사이의 간극이 꽤 크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그래서 오히려 영화의 낭만이 더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지금 다시 아마겟돈을 볼 이유, 디즈니플러스에서 만나는 세기말의 명작
현재 아마겟돈은 디즈니플러스에서 스트리밍으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혼자 볼 때보다 가족과 함께 볼 때 훨씬 더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가족 단위로 소파에 앉아 조명을 낮추고 보기에 이만한 킬링 타임 영화가 흔치 않습니다. 2시간 30분이라는 러닝 타임이 길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이 영화의 흡입력을 증명합니다.
화려한 그래픽 기술이 넘쳐나는 지금의 기준으로 봐도, 1998년의 아마겟돈이 가진 감정적 완성도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영화에서 미장센(Mise-en-scène)이란 화면 안에 배치된 모든 시각 요소, 즉 배우의 위치, 조명, 배경, 색감 등을 통해 연출자가 의도를 전달하는 방식을 뜻하는데, 마이클 베이의 그 미장센이 지금 봐도 세련되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것이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감정의 언어였기 때문입니다.
장르적 측면에서 볼 때 블록버스터 재난 영화의 서사 공식을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가장 오래 기억되는 작품은 스펙터클보다 감정의 진정성을 갖춘 작품이라는 결론이 반복됩니다. 이와 관련한 영화 비평 자료는 IMDb 아마겟돈 페이지에서 관객 평점과 비평가 리뷰를 함께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제 경험상 이 영화는 볼 때마다 조금씩 다른 장면에서 울컥합니다. 처음에는 폭발 장면에서, 두 번째에는 해리의 눈에서, 세 번째에는 에어로스미스의 멜로디가 흘러나오는 순간에서.
아마겟돈은 저에게 단순한 재난 영화 이상의 의미를 가진 작품입니다